나를 잊지 말라는 말 남긴 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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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하상숙 할머니 별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하상숙 할머니(사진)가 2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하 할머니는 중국에 머물렀던 유일한 한국 국적의 위안부 피해자였다.

할머니는 1928년 충남 서산시에서 태어났다. 3남매의 장녀였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도 남의 집 아이를 돌보고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1944년 6월 누군가 “돈을 잘 벌 수 있는 일이 있는데 관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찾아온 남성 2명을 따라 할머니는 집을 나섰다.

서울에서 만난 한 여관 주인이 할머니에게 ‘기미코(君子)’라는 일본 이름을 지어줬다. 같은 해 12월 할머니는 중국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의 지칭리(積慶里)에 도착했다. 들었던 공장은 없었다. 그 대신 무서운 군복을 입은 일본군만 있었다. 일본군은 할머니에게 주사를 놓고 약을 먹였다. 나중에야 ‘아기 못 낳는 약’인 걸 알았다. 8개월간 ‘지옥살이’가 이어졌다. “말을 듣지 않은 언니들은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는 말에 도망칠 엄두도 못 냈다.

광복 후에도 할머니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찢긴 몸과 마음으로 고향을 찾을 자신이 없다’는 마음이었다. 이름도 기미코에서 딴 ‘하군자’로 바꿔 살며 남의 집 일을 해 돈을 벌었다. 1955년 중국인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남편이 데리고 온 세 딸도 정성으로 키웠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갈수록 커졌다. 문제는 국적이었다. 분단 과정에서 중국 내 ‘조선’ 국적자는 모두 북한으로 바뀌었다. 한중이 수교한 뒤인 1999년 기독교단체 등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한국 국적을 되찾았다. 그리고 2003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3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갔다.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 탓이었다. 2010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할머니는 “나라가 잘살게 됐다고 불과 몇십 년 전 나 같은 사람이 있었던 걸 잊어선 안 된다”며 안타까워했다.

할머니는 생전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알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0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에 증인으로 참석해 피해자 참상을 고발했다. 2013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개최한 ‘제1회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기념행사에 참석해 “위안소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일본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고령에도 중국에서 청소 일을 계속하던 하 할머니는 지난해 2월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갈비뼈가 부러지며 폐를 찔렀다. 정부와 중앙대병원 등이 도와 지난해 4월 한국에 와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상태가 호전돼 같은 해 8월 말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으로 옮겨 재활을 시작했다. 6월에는 휠체어를 타고 산책할 정도로 호전됐다.

그러나 7월부터 갑자기 신장 기능이 악화되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결국 이날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빈소에서 만난 할머니의 셋째 딸 류완전(劉婉珍·64) 씨는 “고달픈 삶을 내색 한번 하지 않은 위대하고 강한 어머니였다.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듣지 못한 채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프다”며 울먹였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생존자는 36명으로 줄었다. 빈소는 서울 강동경희대병원이다. 발인 30일 오전 10시. 02-440-8800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위안부 피해자#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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