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하다 송진우 선생 권유로 동아일보 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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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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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 이태영 고문이 말하는 이길용
일장기 말소사건이후 모진 옥고… 어머니 받아오신 옷엔 핏자국
“손기정 선생 영혼과 함께하시길” 부친 유품인 동아일보 사기 기증

이태영 대한체육회 고문(왼쪽)과 김순덕 동아일보 논설주간이 이길용 기자의 유품인 동아일보 사기(社旗)를 들고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이태영 대한체육회 고문(왼쪽)과 김순덕 동아일보 논설주간이 이길용 기자의 유품인 동아일보 사기(社旗)를 들고 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아버지가 월급을 집에 갖고 오신 적이 없다고 들었어요. 지인과 취재원들 만나 밥과 술을 사시고, 국제대회에 나가는 선수가 있으면 경비도 주시고…. 선수들이 귀국하면 집으로 찾아와 ‘보고’를 했다고 해요. 아버지는 그걸로 생생한 기사를 쓰셨고….”

파하(波荷) 이길용 기자(1899∼?)의 3남 이태영 대한체육회 고문(76)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25일 서울 손기정기념관에서 열린 ‘이길용 기자 흉상 제막식’에 가족 대표로 나온 그는 “1950년 7월에 납북돼 생사조차 모르는 아버지의 비석이라도 만드는 게 소원이었는데 감격스럽다. 아버님이 손기정 선생의 영혼과 함께 오래 안식하시기를 빈다”고 말했다.

이 기자가 동아일보에 몸담게 된 데는 고하 송진우 전 동아일보 사장과의 인연이 있었다. 배재학당을 마치고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돌아온 그는 철도국에서 일하던 1919년 임시정부의 비밀문서를 운송하다가 적발돼 수감됐다. 고하 역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옥고를 치를 때였다. 1921년 고하의 권유로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 기자는 1936년 8월 25일 ‘일장기 말소 사건’ 이후 옥고를 치렀고 광복 때까지 복귀하지 못했다. 이태영 고문은 “형무소를 몇 차례 오가며 모진 고문을 받으셨다. 어머니가 받아 오신 옷에는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체육기자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손기정 선생과 함께 출전했던 ‘한국 농구의 아버지’ 이성구 선생은 생전에 “선수를 영웅으로 만드는 실력이 출중했고 체육계 전반을 좌지우지했던 분이었다. 운동경기를 통해 민족정기를 진작한 분으로 두 번 다시 그런 인물은 안 계실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고문은 이날 부친의 유품인 동아일보 사기(社旗)를 본사에 기증했다. 그는 “어머니께서 임종 전에 제 아내를 불러 ‘동아일보 창간(1920년) 때 만든 것’이라며 ‘아버지가 가져오신 것이다. 소중히 보관하라’고 당부하신 유품이다. 아버지께서 모으신 방대한 자료를 전란에 많이 잃어버렸는데 이 사기가 남아 있어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고문도 아버지처럼 체육기자의 길을 걸었다. 1961년 경향신문에 입사했던 이 고문은 “원래 문화 쪽을 취재하고 싶었는데 주위에서 ‘당연히 스포츠 기자를 해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다른 길은 엄두도 못 냈다”며 웃었다. 이후 한국일보, 중앙일보에 가서도 스포츠 기자의 길을 이어갔다.

“아버지의 길을 따라 온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흉상 건립은 ‘누군가를 기억하는 한 그는 살아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독립운동#송진우 선생#동아일보#이길용 기자#손기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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