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이재용 1심 실형… ‘수동적 뇌물공여’ 법리 논란 소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6일 00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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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공여 등 혐의가 인정돼 어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김진동)는 “박 전 대통령은 삼성의 승계 작업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 부회장은 박 전 대통령의 승마지원 요구가 최순실 딸 정유라에 대한 지원 요구임을 알고 있었다”며 “둘 사이에 삼성 승계 작업이라는 포괄적 현안에 대한 묵시적 청탁이 있었다”는 취지로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의 관건은 이 부회장의 뇌물 혐의 인정 여부였다. 박 전 대통령은 언론에서 거론된 삼성의 승계 작업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이 부회장의 경우 언제 정유라에 대한 지원 사실을 알게 됐는지 재판부는 주로 정황으로 판단하고 있다. 인지 시점과 묵시적 청탁 시점 사이의 관계도 명확하지 않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적극적으로 청탁하고 뇌물을 공여했다기보다 박 전 대통령의 적극적인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한 것”이라고 밝혔다. 묵시적 청탁도 청탁이니만큼 명시적 청탁만큼은 아닐지라도 뇌물 요구를 받은 측의 적극성이 어느 정도는 요구된다. 그러나 삼성 승계 작업이 정말 중요하고, 이를 위해 승마 지원이 필요한 일이었다면 훨씬 능동적으로 나섰을 텐데도 이 부회장은 승마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아 박 전 대통령의 질책을 받았다. 게다가 이 부회장이 세 차례 대통령과 독대할 때 경영권 승계에 대해 구체적인 청탁을 한 적이 없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특검과 삼성 측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의사를 밝혔다. 항소심에서 어떤 판단이 내려질지 주목된다.

재판부는 특검이 기소한 449억 원 중 정유라 승마 지원금 등 89억 원만을 뇌물로 인정했다. 삼성의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금 220억 원은 뇌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과의 독대에서 부정한 청탁을 했다는 근거로 제시한 안종범 전 청와대경제수석의 업무수첩, 대통령 말씀자료 등의 증거력을 모두 부인했다. 특검 기소에 무리한 면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통령 탄핵은 여론의 영향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정치적 사법 절차라지만 탄핵 이후의 형사 절차는 훨씬 더 엄격해야 한다. 재판부의 판단은 뇌물죄에 대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으로서 존중해야 하나 아직 항소심과 상고심이 남아 있다. 상급심에서 더 엄밀한 법리에 의한 판단이 이뤄져 ‘글로벌 대기업에 대한 세기의 재판’에 걸맞은 판결이 내려져야 한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본질은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밀접한 유착”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이 전형적인 뇌물 사건이라면 그런 표현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업 쪽이 수동적으로 끌려간 사건에 자본권력이란 말은 어색해 보인다. 그럼에도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정치권력과 기업의 관계를 보는 시각이 훨씬 더 엄격해진 것은 사실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정치권력과 기업과의 관계가 보다 수평적이고 투명하게 업그레이드되기를 바란다.
#이재용#실형#수동적 뇌물공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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