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장원재]김여철과 아리타야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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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도쿄특파원
장원재 도쿄특파원
일본의 3대 정원 중 하나인 가나자와(金澤)시 ‘겐로쿠엔(兼六園)’ 옆에는 ‘교쿠센엔(玉泉園)’이라는 또 다른 정원이 있다. 수령이 400년 가까이 된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조선오엽이라는 품종이다. 묘목을 조선에서 가져와 심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가가(加賀)번의 중신 와키타 나오카타(脇田直賢). 한국 이름은 김여철이다.

한양에서 태어난 그는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일본군에 부모를 잃고 7세의 나이로 일본에 끌려왔다. 포로였지만 특유의 총명함으로 번주 부인의 총애를 받았고, 성인이 된 후엔 탁월한 무공과 행정능력으로 성의 책임자인 마치부교(町奉行)에 올랐다. 가가번은 당시 도쿠가와 막부 다음인 100만 석의 영토를 보유했다. 지금으로 치면 재일동포가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大阪)의 지사를 맡은 셈이다. 그가 얼마나 번주의 신임을 받았는지는 74세에서야 은퇴를 허락받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은퇴 후 “옛 이름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고, 이듬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철’이라는 호로 불렸다. 자신이 죽으면 조선식으로 땅에 묻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와 자손들이 100여 년 동안 만든 정원은 그 기품과 아름다움으로 수백 년 동안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주 도쿄(東京) 신오쿠보에 있는 고려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임진왜란 때 끌려온 포로에 대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 관계자는 “김여철은 시가에 조예가 깊었고, 후손들도 문화 분야에서 대대로 업적을 쌓았다”고 했다. 박물관에 따르면 11대 자손인 와키타 가즈(和)는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서양화가라고 한다. 12대인 와키타 사토시(智)는 동물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끌려온 포로들이 모두 그와 같은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다.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포로 중 일부는 배 안에서 죽어 바다에 던져졌고, 일부는 유럽 등에 노예로 팔려갔다. 조선에 돌아갈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람은 약 7500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일본에서 노비처럼 지내야 했다.

그럼에도 그중 일부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홍호연, 구마모토(熊本) 혼묘지의 주지가 된 여대남…. 그들에게 조선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국 생활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홍호연이 유언으로 ‘참을 인(忍)’자를 남긴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에 남은 이들 중에는 특히 도공이 많았다. 이날 전시의 이름도 ‘아리타야키(有田燒·아리타 도자기) 400년, 망향과 동화의 사이에서’였다. 당시 일본에선 다도가 유행했지만 도자기는 몹시 귀했다. ‘명품 찻잔 하나가 일국일성(一國一城)에 필적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퇴각할 때 도공을 무더기로 잡아갔다.

도공들은 일본 각지로 퍼졌고, 이들이 만든 도자기는 세계에 수출됐다. 이삼평과 백파선이 일으킨 아리타 도자기, 심당길과 박평의가 주도한 사쓰마(薩摩) 도자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조선의 기술에 일본의 감각을 더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박물관에 따르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한 해에만 5만6700개의 아리타 도자기를 수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금액은 현재 가치로 200억 엔(약 2080억 원)에 달한다. 도자기 수출로 번 돈은 이후 일본 근대화의 종잣돈이 됐다.

역사의 불행을 딛고 이국땅에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김여철과 도공들. 박물관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미안함’과 ‘고마움’을 입에 올렸다. 말은 안 했지만 기자도 같은 심정이었다. 한일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양국에서 이들의 삶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장원재 도쿄특파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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