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박찬욱 감독이 들려주는 영화 ‘아가씨’ 외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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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아카입/김영진 박찬욱 외 7인 지음/452쪽·4만3000원·그책

영화 ‘아가씨’ 촬영 현장에서 여주인공 히데코(김민희·왼쪽)의 책 읽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는 박찬욱 감독(오른쪽). 그는 “책을 많이 읽은 히데코는 책을 인용해 말하는 버릇이 있다. 남의 말을 옮겨 쓴다는 건 아기처럼 의존적이면서 냉소적인 성격의 인물임을 드러내는 특징이다”라고 말했다. 그책 제공
영화 ‘아가씨’ 촬영 현장에서 여주인공 히데코(김민희·왼쪽)의 책 읽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는 박찬욱 감독(오른쪽). 그는 “책을 많이 읽은 히데코는 책을 인용해 말하는 버릇이 있다. 남의 말을 옮겨 쓴다는 건 아기처럼 의존적이면서 냉소적인 성격의 인물임을 드러내는 특징이다”라고 말했다. 그책 제공
아카이브(archive·기록저장소)를 ‘아카입’이라고 줄여 제목에 달았다. 편집자는 책머리에 “영화 제목 ‘아가씨’와 운율을 맞춰 말맛을 살리기 위해 변형했다”고 적었다.

오롯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2016년) 하나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한 책. 영화 리뷰 텍스트의 효용이 투명에 가깝게 흐릿해진 지금, 지나가 버린 영화의 기획과 제작에 얽힌 사연을 이삭 줍듯 쓸어 넣은 이런 책은 출현 자체가 기이하다.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이 프랑스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들고 갔던 영화이기 때문에 책이 만들어진 걸까. 물론 아니다. 책장을 들춰보게 만드는 건 엔딩 크레디트를 멀거니 바라보며 되씹었던 씁쓰름한 찝찝함의 기억이다.

‘아가씨’는 잔인하고 야한 영화였던가. 틀림없이 그랬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 여기고 넘겨버리면 그만인, 그저 그런 영화였던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선뜻 잘라 말하기 어렵다.

영화 후반부에서 여주인공 히데코(김민희)는 가짜 남편 후지와라 백작(하정우)을 이불 밖에 앉혀 놓고 혼자 드러누워 ‘가짜 초야’를 치르고는 돌연 잽싸게 일어나 허리끈을 휘둘러 맨다. 그렇게 갑자기 덜커덕 닫혀버린 스크린 앞에 멍한 기분으로 남겨졌던 이라면 책을 통해 몇 가지 매듭을 풀어낼 수 있을 거다.

제작진과 배우들이 주고받은 격려와 자화자찬의 회고로 빼곡한 인터뷰는 슬쩍슬쩍 건너뛰길 권한다. 읽을거리는 4개 장(章) 말미에 끼워 넣은 조밀한 리뷰들이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의 낌새에 둔했던, 또는 짐짓 점잖게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던 이들에게 모든 글은 한결같이 적나라한 직시의 기회를 건넨다.

“영화에서 후지와라 백작을 이끌고 간 것은 ‘남자가 만들어 남자에게 공급하는’ 판타지의 힘이었다. 그건 대개 여성의 욕망에 대한 (남성의) 잘못된 지식에 의한 판타지다. 두 남자 주인공은 여성을 억압하거나 오해한다. 그렇게 여성을 정복하려다가 스스로에게 패배한다.”

결말부에서 히데코와 하녀 숙희(김태리)를 조각배에 태우고 노를 저어가던 백작의 윤곽이 어째서 흐리멍덩하게 뭉개졌는지 새삼 이해가 간다. 그는 이미 두 여자 주인공의 안중에 없는 ‘패배자’였던 거다.

같은 해(1960년) 제작된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가 박 감독의 뇌리에 남긴 흔적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인용돼 교차했는지, “불쾌를 불쾌로 자각하지 못할 만큼 얼얼한 시각적 매력을 선사하며 관객을 도덕적 시험에 들게 했던” 이 문제적 감독이 ‘아가씨’를 통해 객석에 씌워 놓은 올가미는 무엇이었는지, 되짚어 확인하는 묘한 쾌감이 있다.

영화에 대한 사유가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종료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헤어진 연인의 질척대는 하소연 편지와 비슷한 느낌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책, 이런 영화, 이런 감독을 만날 기회는 손편지만큼이나 빠르게 희귀해질 거다. 소설책 ‘핑거스미스’로 시작한 영화였으니, 책으로 닫는 건 꽤 괜찮은 마무리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아가씨 아카입#김영진#박찬욱#아가씨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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