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황성호]재외공관 갑질 신고를 甲에게 하라니…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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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공관 “외교관에 자필로 내라”
행정직원들이 피해 호소하면 “나까지 다친다” 신고 말리기 일쑤

황성호·사회부
황성호·사회부
얼마 전 유럽의 어느 한국 외교공관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어느 날 대사가 행정직원(계약직 직원) ‘총동원령’을 내렸다. 갑자기 대사의 지인이 온다는 이유다. 직원들은 공항으로 지인을 마중 나갔다. 이후 환영 모임부터 환송까지 그들의 몫이었다.

지난 주말 재외공관에서 행정직원으로 일하는 A 씨가 기자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일부다. 그는 재외공관의 ‘갑질’ 실태를 고발한 본보 보도(10일자 A12면 참조)를 접하고 자신이 보고 들은 사례를 낱낱이 정리했다. A4 용지 10장 분량에 달하는 장문의 ‘고발장’이었다. 편지에는 ‘공관장 왕국’으로 불리는 재외공관의 실태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A 씨는 “대사들끼리 자기 지인이 그 나라로 간다고 미리 알리며 행정직원을 동원토록 하는 일도 많다”고 설명했다.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2014년 여름 한 재외공관에서 고위 외교관이 행정직원을 수차례 성추행했다고 한다. 피해 직원은 이 사실을 다른 외교관에게 알렸다. 하지만 그 외교관은 “참아라. 내 성과평가를 하는 사람인데 외교부에 알리면 나까지 다친다”며 입을 다물었다.

드러나지 않은 갑질을 고발한 건 A 씨뿐이 아니다. 한 행정직원은 “오로라를 보고 싶다며 업무와 관련도 없는 북유럽으로 출장 가는 공관장도 있다”고 밝혔다. “말 안 들으면 자르겠다”는 협박에 시달린 직원도 있었다.

현재 외교부는 재외공관 행정직원의 갑질 피해를 파악 중이다. 그러나 직원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외교부가 내부 게시판에 “갑질 사례 신고를 받는다”고 공지한 건 10일 오후 6시. 대통령 지시 후 나흘 만에 내려진 조치다. 갑질을 근절하겠다는 외교부 의지가 의심받는 이유다. 일부 재외공관의 지시는 더욱 황당하다. 피해 사례를 같은 공관 외교관에게 직접 제출토록 한 것이다. 그것도 ‘자필 고백’으로 말이다. 을이 갑에게 “당신이 갑질했다”고 신고하라는 셈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만약 피해 사실을 손으로 써내라는 곳이 있다면 그 역시 징계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과연 외교부가 해묵은 재외공관 갑질을 뿌리 뽑을지, 아니면 또 이벤트에 그칠지 전 세계에 있는 행정직원 3000명이 지켜보고 있다.

황성호·사회부 hsh0330@donga.com
#외교공관#재외공관 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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