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영]힌츠페터 씨 특종의 교훈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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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어려운 이름이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목숨 걸고 찍은 독일 방송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씨(1937∼2016) 말이다. 학창시절 ‘광주 비디오’를 보고 놀란 적은 있지만 그 이름은 기억에 없다. 그의 광주 취재기를 다룬 영화 ‘택시 운전사’를 보고도 쉽게 외워지지 않았다. 왜 이름도 낯선 독일 기자였을까.

해외 학계에서는 5·18민주화운동과 1989년 중국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비교 연구가 활발하다. 모두 정부의 삼엄한 언론 통제로 외신에 의존했던 사건이다. 학자들은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쌍둥이 같은 사태를 왜 미국 언론은 다르게 보도했는가에 주목했다. 톈안먼은 글로벌 톱뉴스였고 광주는 그렇지 않았다. 중국과 한국의 위상이 달라서? 학자들은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1989년 베이징에는 외신 기자 1000여 명이 몰려와 있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5월 14일)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반면 1980년 5월 광주를 찾은 외신 기자는 극소수였다. CNN은 개국 전이었고 서울 지국을 둔 방송사도 드물었다. 제임스 라슨 한국뉴욕주립대 부총장은 CBS와 ABC 보도를 분석한 논문에서 “1970년대 미국 언론에 비친 한국은 늘 학생들이 데모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기자들은 광주사태 초기 익숙한 시위 장면에 주목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현장 기자 숫자의 차이는 보도 내용에도 영향을 주었다. 톈안먼 광장에 있던 외신 기자들은 시위대의 목소리를 주로 전했다. 김성태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가 해외 저널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톈안먼 보도에서 인용한 취재원의 32.2%가 시위 참가자들이었다. 중국 정부 관계자 인용 비율은 16%에 그쳤다. 보도 내용도 시위대에 우호적이었다. 톈안먼 집회는 ‘민주화 시위’였고, 무력 진압은 ‘학살’이었다. 반면 광주에 접근하지 못한 외신의 경우 한국 정부 관계자를 인용한 비율이 45.2%, 시위 참가자들 인용은 12%에 불과했다. 광주 사태는 ‘소요(turmoil)’ 혹은 ‘폭동(riot)’이었고, 무력 진압에 대해선 ‘학살’(48.3%)보다는 ‘통제(control)’나 ‘대응(react)’이라고 표현한 비율(51.7%)이 높았다.

국제뉴스의 경우 언론의 논조가 자국 정부의 정책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이론(인덱싱·indexing 이론)도 확인됐다. 톈안먼 사건 다음 날인 6월 5일 조지 부시 대통령은 무력진압을 성토했지만 지미 카터 대통령은 광주에 대해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5월 23일에야 국무부 대변인이 “안정과 질서 회복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미국에 중국은 잠재적인 위협이지만 한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동맹이었다. 라슨 부총장은 “TV 보도량이 적을수록 정책 결정자들은 공적 담론을 형성하는 데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결론 내렸다.

힌츠페터 씨는 광주 시위를 정부의 ‘폭동’ 프레임에 의존하지 않고 ‘민중 봉기(Volksaufstand)’로 규정했다. 톈안먼을 감정적으로, 광주는 건조하게 보도했던 미국 언론과 달리 그는 대체로 제3자의 시선을 유지했다. 한반도와 이해관계가 별로 없는 독일 기자이기 때문이었을까.

워싱턴포스트 기자로 톈안먼 사태를 취재했던 리처드 하우드 씨는 사망자 수조차 정확하게 보도하지 못함을 자책하며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받는 언론도 진실을 향해 나가며 비틀거린다”고 했다. 때로 넘어지더라도 진실 규명을 위한 필수조건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언론이다. 어렵게 외운 이름 힌츠페터 씨의 광주 취재기에서 새삼 그걸 절감했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위르겐 힌츠페터#광주 시위#민중 봉기#진실 규명#자유롭고 독립적인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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