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직접 정책 결정… 佛 새로운 직접민주주의 실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기성정치 불신… 온라인청원 확산

대혁명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에서 직접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이 열리고 있다. 기성 정당들에 대한 불신으로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커진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정책과 제도를 바꾸는 ‘청원 정치’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2007년 이후 프랑스에서 공식 청원이 이뤄진 건 36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누구나 인터넷에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온라인 청원이 확산되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비롯한 기성 정치권이 청원 제도를 장려하면서 새로운 정치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온라인 청원 사이트 체인지닷오아르지(change.org)의 프랑스 회원 수는 미국 영국 러시아 스페인에 이어 세계 5위. 회원 수 증가 속도는 가장 빠르다. 2012년 시작 당시 6만 명이던 회원은 현재 900만 명까지 늘었다. 지금도 매달 30만 명이 늘고 있고 1000개의 새로운 청원이 올라온다.

프랑스에서 온라인 청원은 입법, 행정, 사법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체인지닷오아르지 프랑스 뱅자맹 데 가숑 대표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시민들이 정책 결정권자들과 토론하고 의사 결정에 개입하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라고 평가했다.

2014년 10월 자클린 소바주 씨는 2년 전 남편을 총으로 살해한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47년 동안 남편이 부인과 4명의 자식을 때리고 강간한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다며 대통령에게 소바주 씨의 사면을 요청하는 온라인 청원이 시작돼 4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지난해 12월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은 소바주 씨의 사면을 발표했다. 가숑 대표는 “프랑스 역사상 시민들이 대통령의 사면을 이끌어 낸 최초의 사례”라고 설명했다.

2015년에는 13세 딸 노라 마리옹 양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폭력을 당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의 엄마는 정부에 교내 폭력 대책을 요구하며 온라인 청원을 시작했다. 서명자가 7만 명을 넘어섰고 직접 청원에 참여하기도 한 교육장관은 그해 11월 교내 폭력을 예방하고 관리하기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온라인 청원을 통해 제도 변화를 이끌어내는 노하우도 축적되고 있다. 올해 5월 16세 소녀 폴린 양이 진통제의 일종인 코데인이 함유된 감기시럽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폴린의 엄마인 크리스텔 씨는 “이런 불행이 재발되지 않도록 코데인을 의사 처방이 있어야 구입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온라인 청원에 글을 올렸고 5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체인지닷오아르지는 프랑스 건강부에 이 청원을 전달하는 한편 엄마의 미디어 출연을 주선해 여론화했다. 지난달 12일 건강부 장관은 코데인을 함유한 약은 처방전 없이 살 수 없도록 제도를 바꿨다.

마크롱 대통령과 안 이달고 파리 시장이 각각 4건과 10건의 온라인 청원에 직접 서명할 정도로 ‘청원 정치’는 일상화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국회의원과 지역의원의 세비 지출 내용을 공개하라’는 청원과 ‘장애인에 대한 생활 지원을 강화하고 아이들 급식에 농약 안 쓴 농산품만 쓰라’는 청원 등에 참여했다. 또 지난달 4일 베르사유궁 연설에서 “프랑스인들의 청원 권리가 더 잘 반영될 수 있도록 국가가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헌법 기관인 경제사회환경위원회(CESE)는 온라인 청원 내용들을 공식 의제로 다룰 것이라고 최근 발표했다.

10만 명 이상이 서명하면 국민투표가 실시되는 스위스, 10만 명 이상이 사인할 경우 의회에서 토론이 열리는 영국처럼 청원 정치는 세계적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국빈 방문 초대를 제안했지만 정작 영국 국내에서 트럼프의 방문을 금지하라는 온라인 청원이 쏟아지면서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청원 정치가 힘을 발휘할 경우 이른바 ‘국민정서법’에 기반을 둔 포퓰리즘이 더욱 판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프랑스#직접민주주의#청원정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