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승건]태릉선수촌이 사라진다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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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태릉선수촌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9월에 충북 진천선수촌이 최종 2단계 준공을 마치면 11월까지 서울 태릉선수촌의 기능을 이전하겠다는 게 대한체육회의 계획이다.

태릉선수촌 존폐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2009년부터다. 그해 6월에 조선 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 태릉(泰陵)과 강릉(康陵)도 포함됐기 때문이다. 태릉선수촌은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과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가 함께 있는 강릉 사이에 있다.

등재 이후 한동안은 논란이 거셌다. 체육계는 보존을 주장했고, 문화재청은 유네스코가 원형 복구를 권고한 만큼 철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논란은 잦아들었다. 관심도 사그라졌다. 최근 주위 사람들에게 “태릉선수촌이 없어진다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대부분 몰랐다. 그중 몇 명은 반문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태릉선수촌이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냐”고.


11월 이후 이곳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이재근 대한체육회 태릉선수촌 촌장은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만큼 일단 관련 논의는 중단된 상태다. 올림픽이 끝나면 문화재청과 다시 협의할 예정이다. 최근 문화재자문위원회를 발족한 것도 이를 대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핵심은 선수촌으로서의 기능을 잃은 이곳의 시설을 어느 정도 남겨두느냐이다.

유적 복원에 초점을 맞춘 이들에게 선수촌 시설은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할 것이다. 반면 체육 관계자들에게 완전 철거는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다. 특히 문화재청이 필수 철거시설로 지목한 국제스케이트장의 경우 2013년 리모델링을 한 데다 지금까지 총 1000억 원이 넘는 돈이 투입됐고, 시민들도 이용하는 시설이라는 점에서 철거할 수 없다는 게 체육회의 입장이다.

태릉선수촌 논란에 앞서 한국 스포츠는 소중한 유산을 잃었다. 2008년에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이다. 1925년 건립돼 한국 스포츠의 중심이었던 동대문운동장은 국민들이 웃고 울며 추억을 쌓은 시설이었다. 그런 곳도 디자인 사랑만 남달랐던 전 서울시장에게는 낡아빠진 건축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스포츠를 무시하거나 스포츠에 무지한 사람이라면 1925년에 만든 ‘국민 시설’ 동대문운동장도 없앴는데 1966년에 만든 ‘선수 시설’ 철거하는 게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더 남겨야 한다. 잘못은 한 번이면 된다.

500년 된 문화재가 50년 된 선수촌보다 가치 있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이 서울시가 지정한 미래유산 태릉선수촌보다 중요하다는 얘기에도 동의한다. 그렇다고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의미 있는 건물 몇 개는 남겨 기념관과 체험관 등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찾으면 좋겠다. 이는 ‘그들만의 섬’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태릉선수촌이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길이기도 하다. 태·강릉 복원 계획이 일부 변경된다고 조선왕릉 40기의 등재를 취소할 만한 사유는 아닐 것이다.

길을 걷다 보면 ‘∼터’라고 안내하는 표석을 볼 수 있다. 한국 엘리트 체육 그 자체였고, 스포츠 선진국들도 모델로 삼았던 태릉선수촌을 그렇게 터만 남겨서야 되겠는가. 진천선수촌이 아무리 크고 좋은들 태릉선수촌의 역사와 기억까지 옮겨갈 수는 없다. 어두운 과거사나 재난의 현장인 네거티브 헤리티지도 기억을 더듬어가며 복원하는 시대다.
 
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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