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시인 신위 “기생 진홍 있어 내가 詩 안써도 될것”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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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기생 66명 인터뷰 모음집 ‘녹파잡기’ 원본 발견
신위가 비평 ‘녹파잡기’ 작품성 대변
평양지방 민속음악 ‘서도소리’ 등… 조선후기 대중문화 체계적 정리
책 찾아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조선 기생은 당대 최고의 연예인”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
‘영희(英姬)는 노래와 춤을 잘하면서도 아무것도 잘하지 못하는 듯이 다소곳했다. 성품이 난초 그리기를 즐겨서 마른 잎과 성근 꽃을 그린 그림은 필묵이 수려하고 윤기가 흘러서 옛 사람의 필의(筆意·붓놀림과 취향)를 깊이 터득했다.’

글과 그림, 노래와 춤 등 각종 예술 분야에 모두 능통했던 1820년대 평양의 기생 ‘영희’. 그녀뿐 아니다. 조선 8도를 돌아다니며 노래와 춤을 연마한 경패(瓊貝), 사치는커녕 굶주린 이를 기꺼이 도와준 차앵(次앵)까지. 당대 최고로 평가받던 평양 기생 66명과 기방에서 활동한 예능인 5명을 직접 만나 이들의 특징을 묘사한 책 ‘녹파잡기(綠波雜記)’의 원본을 최근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56)가 서울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했다.

‘녹파잡기’의 원본을 발견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조선의 평안도 지역은 국방비와 사신 접대 비용으로 쓰기 위해 세금을 한양으로 보내지 않고 평양에서 거둬 소비했다”며 “평양은 물자가 풍부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 역량도 매우 높아 평양 기생은 당대 최고로 평가받았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녹파잡기’의 원본을 발견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조선의 평안도 지역은 국방비와 사신 접대 비용으로 쓰기 위해 세금을 한양으로 보내지 않고 평양에서 거둬 소비했다”며 “평양은 물자가 풍부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 역량도 매우 높아 평양 기생은 당대 최고로 평가받았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2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만난 안 교수는 “지금으로 따지면 문화예술계 최고의 스타만을 골라 인터뷰하고,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라며 “음악 미술 무용 등 조선후기 대중문화 전반에 관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책에는 예술가의 경지에 오른 기생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기생 화월(花月)의 노랫소리에 대해 “모래밭의 갈매기는 깜짝 놀라 날아오르고, 지나가던 구름도 멈춰서 노래를 들었다”고 묘사했다. 영주선(瀛洲仙)에 대해서 “가는 눈썹에 도톰한 뺨을 하고, 담박한 말투에 은근한 미소가 일품이다. 봄날 난간에 기대어 서글픈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면 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이번에 발견된 원본을 통해 녹파잡기의 비평을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신위가 쓴 것으로 확인됐다. 18세기 중반부터 중국을 통해 들어온 비평은 조선 후기 본격적으로 유행하던 문학 장르였다. 안 교수는 “조선 후기 문학 중에서도 최고로 여겨지는 일부 작품에서만 비평이 발견된다”라며 “신위가 직접 비평을 했다는 점에서 녹파잡기의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신위의 비평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지식인의 유쾌한 유머를 느낄 수 있다. 시를 잘 읊기로 유명했던 기생 진홍(眞紅)에 대한 서술을 보고 신위는 “당나라 시를 즐기는 진홍이 있어 나 같은 이는 시 한 편쯤 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평양 지방의 민속음악 ‘서도소리’와 관련한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된 점도 주목된다. 녹파잡기에는 평양 기생들이 직접 부른 제갈가(諸葛歌), 서수원창(西水院唱) 등의 곡목이 소개돼 있다.

녹파잡기는 1829년 개성 출신의 양반이었던 한재락(韓在洛)이 쓴 책으로, 저자가 직접 만난 평양 기생들을 기록한 일종의 르포 인터뷰 모음집이다. 안 교수는 “할아버지 한대훈(韓大勳)이 인삼밭을 경영해 큰 부를 축적한 덕분에 집 안에 수만 권의 책을 비치하고 조선 후기 최고의 문호들인 박지원, 유득공, 박제가, 신위 등과 교류했다”라며 “학문과 예술의 깊은 소양을 갖췄지만 능력을 펼칠 수 없었던 지식인이 풍류를 즐기며 체험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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