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인의 잡학사전]태풍 한자가 太風 아니라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4일 18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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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기운이 감돌고 있는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동아일보DB
태풍 기운이 감돌고 있는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동아일보DB

여름마다 뉴스에 등장하는 그 이름 태풍. 이번에는 ‘노루’가 한반도로 찾아오네 마네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뚱맞은 퀴즈 하나. 태풍은 한자로 어떻게 쓸까요?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아마 십중팔구는 클 태(太), 바람 풍(風)을 써서 ‘太風’이라고 쓰실 겁니다. 태풍은 정말 큰 바람이니까요. 제목을 보고 이게 아니라는 걸 아셨다면 또 다른 클 태(泰)를 써서 ‘泰風이라고 쓰나 보다’하고 짐작한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짜 정답은 ‘颱風’입니다. 여기서 颱는 ‘태풍 태’ 혹은 ‘몹시 부는 바람 태’입니다. 그러니까 颱라는 글자 자체가 태풍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겁니다. 태풍을 일본어로는 ‘台風(타이후)’, 중국어로는 ‘台風(타이펑)’이라고 쓰는데 台라는 글자 역시 뜻 자체가 태풍입니다.
‘颱風(태풍)’이라는 낱말이 동아일보에 처음 처음 등장한 1920년 8월 22일자 지면. 당시에는 현재 일본어나 중국어처럼 한국에서도 날씨를 한자로 ‘天氣(천기)’라고 표기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颱風(태풍)’이라는 낱말이 동아일보에 처음 처음 등장한 1920년 8월 22일자 지면. 당시에는 현재 일본어나 중국어처럼 한국에서도 날씨를 한자로 ‘天氣(천기)’라고 표기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颱風(태풍)이라는 두 글자는 동아일보 창간 첫해였던 1920년 지면에 바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표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현대어로 바꾼 부분에만 태풍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뿐입니다. 조선 고종 19년(1882년) 세 번째 기사에도 태풍을 뜻하는 표현은 ‘구풍(¤風)’이었습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구풍을 “열대 지방에서 발생하는 열대성 저기압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돌개바람하고 비슷한 뜻이라고 풀이합니다. 요컨대 원래 구풍이라는 표현이 있었고 태풍은 비교적 ‘신조어’인 셈입니다.

태(颱)라는 글자는 청나라 초기 왕사진(1634~1711)이 지은 ‘향조필기(香祖筆記)’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는 대만 지역 기후를 설명하면서 “바람이 크고 맹렬한 것을 ‘구(¤)’라 하고, 더 심한 것을 ‘태(颱’‘라 한다(風大而烈者爲¤又甚者爲颱)”고 썼습니다. 단, 태는 1918년 세상에 나온 중화대자전(中華大字典)에도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이 글자를 널리 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최근 10년(2007~2016년)간 발생한 모든 태풍 경로. 투명도를 25%로 그려도 대만(노란색 동그라미 안)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대만 기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태풍이 처음 등장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최근 10년(2007~2016년)간 발생한 모든 태풍 경로. 투명도를 25%로 그려도 대만(노란색 동그라미 안)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대만 기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태풍이 처음 등장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재미있는 건 태풍을 뜻하는 영어 낱말이 ’typhoon‘으로 태풍하고 소리가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태풍이 typhoon이 된 건지 거꾸로 typhoon이 태풍이 된 건지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학자들이 동의하는 건 20세 초반에 일본에서 typhoon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颱風‘ 또는 ’台風‘이라고 쓰면서 태풍이 태풍이 됐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한글도 손으로 쓰는 일이 드문 시대. 한자를 직접 쓸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 한자 연습을 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몰라 태풍을 한 번 더 한자로 대문짝만하게 남겨 놓겠습니다. 태풍은 한자로 이렇게 씁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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