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헬레니즘-이슬람 문화 뒤섞인 인류문명의 보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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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터키 수교 60주년, 동서 문명교류 현장을 가다

터키 이즈미르주 ‘크즐 아블루(붉은 대성당)’ 유적. 붉은 벽돌로 지은 성당 앞으로 이집트 여신인 세크메트상이 서 있다.
터키 이즈미르주 ‘크즐 아블루(붉은 대성당)’ 유적. 붉은 벽돌로 지은 성당 앞으로 이집트 여신인 세크메트상이 서 있다.
《“우리는 아시아의 가장 동쪽과 가장 서쪽에 떨어져 있지만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지난달 22일(현지 시간) 터키 현지에서 만난 무라트 귈야즈 네브셰히르 박물관장이 한국 답사단에 건넨 말이다. 터키는 6·25전쟁 당시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1만5000여 명을 파병해 3400명의 희생자를 냈다. 올해 양국 수교 60주년을 맞아 터키 문화관광부 초청으로 국내 역사·고고학자들이 터키 유적을 답사했다. 기원전 74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부터 히타이트, 그리스, 로마를 거쳐 13세기 이후 오스만튀르크 유적까지 동서 문명을 아우르는 터키의 역사 현장을 다녀왔다.》
 

돌로 포장된 약 10m 너비의 도로를 가운데 두고 사람 키를 넘는 거대한 대리석 열주(列柱)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시리아길’로 불리는 이 대로는 거대한 고대도시를 격자형으로 구획하는 중심축이다. 900m 길이의 시리아길을 걷다 보면 42m 간격으로 갈라지는 중간 도로들을 볼 수 있다. 도심을 거미줄처럼 잇는 이 도로는 이미 폐허가 된 대형 신전과 아고라(광장), 원형극장을 촘촘히 연결한다.

지난달 19일 찾은 터키 데니즐리주(州) 라오디게아 유적은 터키를 “살아있는 인류 문명의 야외박물관”에 빗댄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말을 실감케 했다. 라오디게아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기원전 3세기 중엽 세워져 기원전 133년 로마에 복속됐다. 기원후 7세기 초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붕괴될 때까지 직물 교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터키 아나톨리아반도에서 가장 큰 스타디움을 비롯해 극장 2개와 목욕탕 4개, 아고라 5개, 분수대, 시의회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지난달 19일 터키 데니즐리주 라오디게아 교회 유적. 돌로 쌓은 둥근 아치의 출입문과 기둥, 벽체들이 남아있다. 로마의 기독교 공인 직후인 서기 4세기 초에 세워졌다.
지난달 19일 터키 데니즐리주 라오디게아 교회 유적. 돌로 쌓은 둥근 아치의 출입문과 기둥, 벽체들이 남아있다. 로마의 기독교 공인 직후인 서기 4세기 초에 세워졌다.
무엇보다 이번 답사에서는 초기 기독교 7대 교회 중 하나로 4세기 초에 건설된 ‘라오디게아 교회’가 처음 공개됐다. 이곳은 서기 363년 ‘라오디게아 공의회’가 열려 초기 교회제도를 규정한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은 이 교회에 대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기록했다. 부유한 자들의 열정이 식었음을 책망한 것이리라.

시리아길에서 북쪽 극장으로 가는 중간 도로변에 세워진 라오디게아 교회는 2003년 터키 파묵칼레대에 의해 발굴된 이후 4년에 걸쳐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교회 유적은 가로 40m, 세로 37m 규모로 천장 없이 출입구와 기둥, 바닥, 벽체만 남아 있었다.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철제 구조물로 덮은 상태였다.

교회 입구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문이 나란히 설치됐는데, 벽돌로 만든 아치 기둥 좌우로 돌에 새긴 십자가 장식이 선명했다. 교회 북동쪽 가장자리에 웅덩이를 파고 석재를 돌린 세례당(洗禮堂·baptistery)은 정확히 십자가 모양을 띠고 있다. 예배당 바닥을 치장한 기하학 무늬의 채색 모자이크도 비교적 생생했다. 이 중 하트 3개를 연달아 그린 모자이크는 성부, 성자, 성령을 상징한다. 젤랄 심셰크 파묵칼레대 교수(발굴단장)는 “교회 기둥 중 절반 이상이 근처 로마신전에서 가져온 것들”이라며 “기독교 공인 이후 비잔틴 양식으로 건축의 변화가 잘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이즈미르주(州) ‘크즐 아블루(붉은 대성당)’ 유적도 고대 로마와 비잔틴, 이슬람 문명까지 가세한 터키의 독특한 문화적 색채를 보여준다. 실제로 붉은 벽돌로 지은 거대한 성당 앞에는 복원한 이집트 여신인 세크메트상이 서 있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곳은 2세기 이집트 신을 섬기는 로마신전으로 지어진 뒤 5세기 비잔틴 성당으로 쓰였다가 오스만튀르크 시대 이후 모스크로 사용됐다. 답사단을 이끈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오리엔트와 헬레니즘, 이슬람 문명이 뒤섞인 진귀한 풍경”이라고 말했다.
 
 
▼축구장 넓이의 종자 창고… 대제국의 저력을 엿보다▼
 
오리엔트 최강 히타이트 왕국
 
야즐르카야 유적엔 ‘바위 부조’ 생생
독특한 구조의 차탈회위크 유적… 공동 생활 하던 당시 주거지 보여줘

지난달 21일 터키 코니아주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에서 이언 호더 스탠퍼드대 교수가 기원전 7000년 무렵 지은 주거지의 벽체를 설명하고 있다.
지난달 21일 터키 코니아주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에서 이언 호더 스탠퍼드대 교수가 기원전 7000년 무렵 지은 주거지의 벽체를 설명하고 있다.
대제국을 호령한 위대한 왕들도 죽음 앞에선 한없이 소박했을까.

지난달 23일(현지 시간) 터키 초룸주(州) 하투샤의 야즐르카야 유적. 하투샤는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로, 기원전 13세기 조성된 야즐르카야는 봄 축제나 왕의 즉위식을 거행한 국가 성소(聖所)였다. 세계 최초로 철기문명을 발명하고 기원전 16세기 바빌로니아 왕국을 멸망시킨 오리엔트 최강국 히타이트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곳에서 여지없이 깨졌다.

주변 평원에 세워진 거대한 성벽과 도시, 신전들과 비교할 때 별다른 인공물 없이 바위로만 둘러싸여 천장조차 없는 야즐르카야는 아늑하기까지 했다. 인간의 손이 닿은 흔적은 신들과 왕의 모습을 바위에 새긴 부조(浮彫)가 전부였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히타이트인들의 정신적 본향이 원시 자연주의 신앙이었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특히 눈길을 끈 건 커다란 바위틈 사이로 협곡처럼 좁은 통로를 지나면 만날 수 있는 60m² 남짓한 공간이었다. 왕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암벽을 굴착한 벽감(壁龕) 건너편으로 사람 키만 한 두 개의 부조가 선명했다. 벽감과 가까운 부조는 히타이트 최고(最高) 신인 테숩의 아들 ‘샤루마’가 왕을 팔로 감싼 채 앞으로 걸어가는 장면이다. 어디로 가는 걸까. 정답은 바로 옆 부조에 있다. 포효하는 사자 네 마리를 두 손으로 거꾸로 매단 채 큰 칼을 휘두르는 죽음의 신 ‘네르갈’의 모습이 담겼다.

지난달 23일 터키 초룸주 하투샤 야즐르카야 유적에서 안드레아스 샤흐너 발굴단장이 군인 12명을 돌에 새긴 부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왕의 시신을 안치한 벽감과 또 다른 부조가 보인다.
지난달 23일 터키 초룸주 하투샤 야즐르카야 유적에서 안드레아스 샤흐너 발굴단장이 군인 12명을 돌에 새긴 부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왕의 시신을 안치한 벽감과 또 다른 부조가 보인다.
12년 동안 이곳을 연구한 독일 고고학자 안드레아스 샤흐너 발굴단장은 “샤루마가 무덤에서 깨어난 왕을 보호해 네르갈에게 인도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기원전 1274년 히타이트는 초강대국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카데시(현재의 시리아 지역)에서 전쟁을 벌였다. 16년에 걸친 전쟁은 결국 세계 최초의 성문 평화협정인 ‘카데시 조약’으로 이어졌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카데시 조약 점토판은 가로 13.8cm, 세로 17.6cm 크기에 수많은 쐐기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교수는 “전쟁 재발 방지부터 포로교환 인도주의 조치까지 적시돼 현재의 국제법과 비교해도 손색없다”고 말했다.

척박한 땅에서 히타이트가 대제국을 이룬 저력은 무엇일까. 샤흐너 발굴단장은 식량과 치수(治水) 정책을 꼽았다. 부근에서 축구장 넓이의 거대한 창고를 발굴했는데, 놀랍게도 오랜 가뭄을 대비한 ‘종자 보관소’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는 “10∼12년 단위로 큰 가뭄이 들어 생태시스템이 붕괴될 때를 대비한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터키 아나톨리아반도에는 세계 고고학계를 흥분시킨 선사유적이 여럿 있다. 지난달 21일 찾아간 코니아주(州)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은 거대한 철제 돔 안에 기원전 7000년 무렵 지은 주거지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흥미롭게도 흙으로 지은 집들은 마치 거대한 개미굴처럼 서로 벽체를 접한 상태였다. 25년 동안 차탈회위크 유적을 발굴한 이언 호더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이곳엔 거리가 없었고 사람들은 벽을 뚫은 구멍이나 지붕 위로 왕래했다”며 “이들에겐 현대적 개념의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인골에 대한 유전자 분석 결과, 한 주거지 내 무덤에서 직계 혈연관계가 거의 발견되지 않은 사실도 주목된다. 호더 교수는 “사유 재산 없이 수확물을 똑같이 분배하는 과정에서 육아마저 혈연과 상관없이 공동으로 책임진 것으로 분석된다”고 덧붙였다.

데니즐리·이즈미르=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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