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장치로 배 눌러 노래연습… 하루 3시간뿐이어도 행복한 인생”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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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마비 가수 김혁건씨
5년전 교통사고로 근육마비… ‘지옥에 피는 식물’ 같은 고통 극복

14일 서울 성북구 작업실에서 만난 김혁건 씨는 배를 누르는 기계장치를 착용하고 노래 연습을 했다. 그는 “기계에 의지해 하루 단 3시간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행복하다”고 말했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14일 서울 성북구 작업실에서 만난 김혁건 씨는 배를 누르는 기계장치를 착용하고 노래 연습을 했다. 그는 “기계에 의지해 하루 단 3시간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행복하다”고 말했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무대 위 휠체어에 앉은 가수가 ‘악기’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배 위에 검은색 철제 기계를 올렸다. 피스톤 같은 물체가 가수의 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헉’ 하는 얕은 신음을 내뱉은 가수는 노래를 시작했다.

“넌 할 수 있어. 힘들지만 언제나 이겨 냈잖아. 어두운 밤 지나 태양이 눈뜰 때 넌 다시 태어날 거야.”

기계는 여러 차례 가수의 배를 깊숙이 눌렀다. 노래를 마친 가수는 가쁜 숨을 토해냈다. 객석에서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1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올림푸스홀에서 열린 사회복지법인 ‘따뜻한 동행’ 주최 콘서트. 김혁건 씨(36)는 이렇게 자작곡 ‘넌 할 수 있어’와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넬라 판타지아’를 불렀다.

김 씨는 5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사지 마비’ 판정을 받았다. 손가락 일부를 제외하곤 팔다리를 전혀 쓸 수 없게 됐다. 무엇보다 큰 고통은 배 근육이 마비돼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다치기 전에 그는 록밴드 ‘더 크로스’의 보컬이었다. 주로 홍익대 앞에서 공연했고 대학 축제에도 자주 초대받았다.

14일 서울 성북구의 개인 작업실에서 다시 만난 김 씨는 음정과 박자에 맞춰 자신의 배를 압박하는 기계를 ‘악기’라고 불렀다. 외부의 힘으로 횡경막이 올라가야지만 소리를 낼 수 있는 김 씨에겐 이 기계가 악기인 셈이다.

김 씨는 사고 직후 혈액순환이 안 돼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했다. 당시 처지에 대해 “나는 지옥에 피는 식물 같았다. 도망칠 수도, 무엇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잡초였다”고 말했다. 무기력한 삶이 이어지던 어느 날 김 씨의 아버지가 “배를 눌러줄 테니 노래를 해보라”고 제안했다. 기적처럼 노래를 할 수 있었다. 다친 뒤 처음 부른 노래가 ‘넌 할 수 있어’였다. 김 씨의 자작곡 중 유일하게 낮은 음정들로 구성된 노래였다.

이후 김 씨의 아버지는 대학 기계공학과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배를 눌러주는 장치를 만들어 달라”고 사정했다. 여러 교수에게 거절당한 끝에 서울대 로봇융합연구센터장 방영봉 교수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제대로 작동하는 기계를 만드는 데 1년이 걸렸다.

김 씨는 “이 기계로 피눈물 나게 노래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하루에 앉아서 지낼 수 있는 단 3시간을 온전히 노래 연습에 쏟아 부었다. 음정이 사고 전 4옥타브까지 올라갔지만 지금은 기계에 의존하는 탓에 불안하다. 그래도 행복하다. 김 씨는 “하루에 단 1시간도 웃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나는 3시간이나 행복하다. 이 정도면 행복한 인생 아닌가”라고 말했다.

김 씨는 이번 달부터 본격적인 무대 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기업과 병원에서 그를 초청한다. 김 씨는 “내가 부럽다고 말하는 장애인이 많다. 하지만 나도 여전히 절망감, 좌절감, 공포와 싸우고 있다. 행복하기 위해 우린 더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신민경 인턴 기자 서강대 영미어문학과 4학년
#사지마비 가수 김혁건#서울대 로봇융합연구센터장 방영봉 교수#넌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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