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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의 연극인 열전]한일가교 이시카와 쥬리 “운명에 충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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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의 연극인 열전]한일가교 이시카와 쥬리 “운명에 충실하고 있다”

심규선 고문 입력 2017-07-02 09:03수정 2017-07-03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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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넘게 한국에 살면서 한일 연극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이시카와 쥬리(石川樹里). 처음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긴가민가 했는데 실제로 존재했다. 그는 한국에서 연극을 위해 일하게 된 것을 ‘운명’이라고 했다. 그는 번역하고, 자막을 만들고, 코디하고, 통역을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풍요까지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의 꿈은 여전히 한국의 좋은 희곡을 일본에 많이 소개하는 것이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연극인들을 인터뷰하면서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운명’이라는 단어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에 이끌려 연극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말이다. 그러니 운명은 사랑이다. 그의 입에서도 ‘운명’이라는 말이 나왔다.

“1991년에 다시 한국으로 왔다. 그전부터 다시 한국에 오고 싶었고, 한국에서 일자리를 잡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한국에 다시 왔을 때 나는, 한국에서 연극을 위해 일하는 게 나의 운명이라고 느꼈다.”

운명의 톱니바퀴는 1985년 대학에 들어가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하면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대학 재학 때 여러 번 한국에 와서 연극을 봤다. 졸업논문 테마가 한국의 마당극 운동이었다. 한국의 마당극을 좋아했지만 회의도 들었다. 어디까지가 운동이고, 어디까지가 예술인가. 구호도 많았고 스타일이 비슷한 연극도 흔했다.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한국 연극의 예술성, 세련미, 아름다움이 아쉬웠다. 그런데 연우무대 연극은 완전한 마당극도 아니고, 사회적 시각과 예술성이 융합되어 있었다. 내 논문은 연우무대를 중심으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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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들면서부터 한국 연극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그는 누구인가. ‘그’는 25년 넘게 한국에 살면서 한일 연극의 가교로서 번역가, 스태프, 코디네이터, 통역 등으로 활약하고 있는 일본인 이시카와 쥬리(石川樹里·52)다. 6월 26일 동아일보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인터뷰를 하기 전에 개인 신상보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춰달라고 여러 번 얘기했다.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인 여성이 25년 이상 한국에 살면서 연극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특이한 사례다. 그러니 ‘무엇을’ ‘어떻게’도 중요하지만 ‘누가’ ‘왜’에 대한 관심도 클 수밖에 없다. 그가 한국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말하지 않고는 지금의 그를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인터뷰 때도 말했지만, 그에게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하면서 ‘일’보다 ‘그’를 먼저 소개한다.

1. 한국연극을 만나다.

이시카와는 가나가와(神奈川)현 후지사와(藤澤)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후지사와에서, 고교는 요코하마에서 다녔다. 대학은 도쿄 마치다(町田)의 와코(和光)대학 인간관계학과를 졸업했다.

인간관계학과라는 게 생소하다.

“고교 때 사춘기가 늦게 왔다. 대학을 가야할지 말지도 결정하지 못하고 땡땡이도 치면서, 삶을 고민했다.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그래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결합한 인간관계학과를 택하게 됐다.”

중학교와 대학에서는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대학에서는 4년 동안 주로 연기를 했는데 매년 2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일본 창작극도 있었고, 외국 번역극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됐나.

“기자였던 아버지의 꿈은 원래 영화감독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우리 남매(그에게는 다섯 살 아래 남동생이 있다)에게 영화와 연극을 많이 보여주셨다. 아버지는 책을 많이 읽으셨는데, 그것도 침대에 누워서 읽는 게 취미셨다. 우리 남매가 침실로 들어가면 아버지는 머리맡에 쌓여 있는 책 중에서 하나를 골라 소리 높여 읽어주셨다. 책을 읽어주는 행위 자체가 연극이다.”

대학에서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그것도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의 한국인 지인과 가족들이 우리 집에 많이 놀러왔다. 그래서 어머니가 먼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나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택하게 된 것이다.”

그는 대학 3학년 때인 1987년 여름 방학 때 처음으로 서울에 온다. 6월 항쟁의 열기가 남아있던 때였다. 일본 매스컴은 그 전부터 한국의 열띤 데모를 보도했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그의 한국행을 걱정했다.

“와코 대학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는 학생들과 함께 서울에 와 3주 정도 머물며 YMCA에서 일본어공부를 하는 한국 대학생들과 어울렸다. 팀을 이뤄 서울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공식 일정을 끝내고 혼자서 경주와 부산에도 가봤다. 처음이라 그런지 한국의 에너지, 열기, 파워를 느꼈다. 편의점도 거의 없고, 햄버거 가게도 그리 많지 않은 시절이었는데, 남학생들은 자신의 미래보다 나라의 민주화를 얘기했다.”

그는 3학년 겨울방학에도, 4학년 여름방학에도 혼자 서울에 와 한달씩 머물며 명동과 대학로 등에서 열심히 한국 연극을 관람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 곧바로 한국으로 가겠다고 마음먹는다. 한국을 오가는데 드는 경비는 거의 아르바이트로 충당했다.

1989년 3월 대학을 졸업을 하자마자, 결심한 대로 바로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1년을 예상하고 연세대 어학당에 들어갔다. 그러나 와코 대학에서 배운 한국어실력이 좋아서인지 5급 3개월을 공부하고 졸업급수인 6급으로 올라가 3개월을 더 공부하고 수료했다(와코대학에서 제2외국어는 2년만 공부하면 되지만 그는 4년 내내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한국어를 배우고 연극에도 관심이 있으니, 교집합인 한국 연극에 끌린 것일까.

“앞서 말했듯, 나는 고교 때 인간의 행복을 고민했다. 그런데 연극을 통해 좀 더 나은 사회나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연극은 사회와의 연계성이 강한 예술이니까. 일본의 80년대는 버블시대였고, 일본 연극은 버블경제를 그대로 무대에 올려놓은 듯했다. 판타지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연극은 이런 게 아닌 거 같았다. 그런데 한국 연극에는 사회와의 연계가 있었고, 신선했다.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이 아니라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게 한국 연극에는 있었다.”

그는 한국 연극의 매력을 당시에 유행하던 마당극(민족극)에서 확인했다. 물론 그런 연극 양식의 한계도 인식했기에 예술성과 사회성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한 연우무대에 끌린 듯도 하지만…. 당시에 그처럼, 분명한 문제의식을 갖고 외국에까지 가서 필드워크를 하고 학부 논문을 썼던 한국 대학생이 과연 몇 명이나 됐을까.

2. 한국연극을 배우다

연세대 어학당을 졸업한 그는 1989년 가을 일단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해 11월 한국 연극을 더 가까이서 볼 기회를 만난다.

“오태석 씨가 ‘불의 나라’(박범신 원작)라는 작품을 도쿄 파르코극장에서 공연하는데, 스태프를 찾는다고 했다. 일한 건 몇 주밖에 안됐지만 굉장히 친해졌다. 오태석이 이끄는 극단 목화는 1년에 두 번 정도 일본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 때마다 도와주게 됐다.”

그 때 이시카와의 나이 25살. 그처럼 젊고, 한국 연극에 이해와 애정을 갖고 있으며, 한국어에도 능통한 일본인 스태프가 어디 또 있겠는가.

1991년 그는 다시 한국으로 온다. 앞서 언급한 ‘운명’을 느끼면서. 그러나 그때는 연극일로 온 것은 아니다. 시사영어사의 일본어 강사로 와서 1년 정도 종로에서 일본어를 가르쳤고, 그 후 가끔 아르바이트도 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돈을 벌기 위해 몇 달간 코트라(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도쿄사무소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의 한국행에는, 중요한,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극단 목화를 돕는 과정에서 배우 김세동 씨(54)와 사랑을 하게 됐고, 1992년 4월 결혼한다(그에게는 14살짜리 아들이 있다).

그는 1993년에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다. 연극평론가이자 한국연극계의 원로인 서연호 교수를 보고 들어간 것인데, 교양 과목과 한문 등에는 흥미를 못 느꼈다. 그래서 곧 그만 둔다.

그런데 이듬해인 1994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연극원이 문을 연다. 그는 1기로 입학한다.

“한예종 연극원은 나를 위해 만들어진 대학이라고 생각했다. 국립이어서 학비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고3에서 바로 입학한 학생보다, 다른 대학을 졸업했거나 중퇴하고 온 사람이 많았다. 연기과. 무대미술과, 극작과, 연극학과, 연출과가 있었는데 나는 연극학과였다. 동기생은 5명이었지만 4년 만에 졸업한 건 나 혼자였다. 연극원을 통틀어 외국인도 나 하나였고.”

그는 ‘틀에 박힌 이야기’라는 20분짜리 한국어 희곡을 쓰기도 한다. 이 작품은 1999년 여름, 극단 연우무대와 공연기획 이다가 단막극 4편을 옴니버스식으로 묶어 ‘풀코스 맛있게 먹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올릴 때 그 속에 들어갔다.

이때까지 그가 걸어온 길을 배우에 비유한다면 극단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대사도 몇 마디 안 되는 단역을 맡아온 것이고, 연출가에 비유한다면 무대 스태프와 조연출 등을 하면서 묵묵히 기회를 기다린 것이나 마찬가지다(그러니 다른 연극인을 인터뷰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떡잎 시절’도 소개하는 게 마땅하다).

3. 한일연극의 가교가 되다

1998년 한예종 연극원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공연하는 일본 극단들의 대본 번역이나 통역 스태프로 참여했다. 2002년에는 한국 예술의전당과 일본 신국립극장이 공동제작한 ‘강 건너 저편에’(히라타 오리자·김명화 공동집필)를 번역한다. 본격적인 한일합작 시대를 연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수작이다. 그는 히라타 오리자가 쓴 것은 한국어로, 김명화가 쓴 것은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두 사람의 문체를 조화롭게 조율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에게 딱 맞는 일이었다.

이시카와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단체가 있다. 2002년에 발족한 한일연극교류협의회다. 협의회는 한국연극협회, 서울연극협회,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한국희곡작가협회, 한국연극연출가협회,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 한국무대미술가협회 등 7개 전문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일본 측 카운터파트는 일한연극교류센터. 두 단체는 발족이후 매년 번갈아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상대국의 현대희곡 낭독공연, 번역희곡집 출판, 심포지엄 및 워크숍 등을 개최하고 있다. 협의회 회장은 김윤철, 심재찬, 박명성, 허순자, 김광보를 거쳐 지금은 구자흥(전 명동예술극장 극장장)이 맡고 있다. 협의회는 9월 ‘한일 극작가 포럼’을 열고, 내년 3월에는 남산예술센터에서 ‘제8회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과 심포지엄’을 준비중이다.

이시카와는 2002년 이후 줄곧 한일연극교류협의회와 일한연극교류센터의 전문위원으로 일하며 모든 행사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2014년 ‘페스티벌 도쿄’ 초청작인 극단 크리에이티브 바키의 ‘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이경성 구성·연출)의 한 장면. 이시카와는 번역과 자막제작을 맡았다. 그는 평소 자막의 존재는 인식되지 않아야 좋다고 했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실험적인 자막을 만들고 싶었다. 이경성 연출이 그 뜻을 수용하자 그는 자막에 쓰인 일본어로 문양을 만들거나 꽃잎처럼 흩날리면서 사라지게 만드는 등의 시도를 했다. 이런 시도는 성공했고, 작품의 한 요소로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독일에서 공연할 때도 그 시도는 그대로 유지됐다고 한다. 사진제공 페스티벌 도쿄(촬영 아오키 쓰카사)

“연극 분야에서 특정 국가간에 두 단체처럼 오랫동안 교류를 해오고 있는 단체는 없다. 협의회는 그 전에 임영웅, 김의경, 박조열 씨 등 일본어가 가능한 연극계 원로들이 일본 연극계 원로들과 개인적으로 교류해온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후 체계적으로 교류를 해보자고 해서 만든 게 협의회다. 베세토 연극제(베이징, 서울, 도쿄의 약자로 1994년 서울에서 처음 시작했고 매년 세 도시를 돌아가며 개최한다)도 그래서 생겼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연극 교류는 사람 교류인데, 배우 스태프 등 많은 사람이 오가야 한다. 지리적으로 가깝지 않으면 힘들다.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데다, 서구연극에는 거리감이 있지만 두 나라는 정서적으로도 갭이 적어 교류가 오래가는 것 같다. 양국에서 희곡집을 10권씩 내는 것이 목표인데, 그렇게 되면 상대국 작품 50편씩 소개하는 것이 된다.”

두 단체는 현재 한국에서는 ‘현대일본희곡집’을 7권까지, 일본에서는 ‘한국현대희곡집’을 8권까지 발행했다. 이시카와는 일본어로 7편, 한국어로 5편을 번역했고, 번역을 안 할 때는 감수자로 참여했다(지원금만으로 운영하는 비영리단체이다 보니 일하는 사람들 거의가 무료봉사하다시피 한다).

그의 일은 번역으로 끝나지 않는다. 번역 작품이 실제 무대에 오를 때는 자막 제작도 그의 일이다. 종종 양국 사이에서 코디네이터 역할과 통역도 맡고 있다. 한일 연극 교류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번역에 대한 나름의 원칙이 있을 듯하다.

“나에게 희곡번역은 연기와 같다. 배우는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생각하고, 그 의도를 살리기 위해 고민하면서 연기한다. 하지만 10명의 배우가 같은 햄릿을 연기하더라도 10인10색의 햄릿이 나온다. 나도 희곡을 번역할 때, 작가의 의도를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는가를 가장 고민한다. 그러나 번역도 번역가에 따라 10인10색이다. 한국어를 일본어로 번역할 때라면, 나는 만약 이 작가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어떻게 썼을까 하고 상상하면서 번역한다. 번역하는 동안에는 나는 그 작가를 연기하는 기분이다.”

그는 자막 번역은 대본 번역과는 또 다른 작업이라며 상당히 공을 들이는 편이다.

“공연 자막은 아직까지도 대본을 그대로 잘라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자막번역은 따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국작품을 공연할 때는 배우의 연기보다 자막을 쫓아가기에 바쁜 공연도 있다. 자막은 작가나 작품의 의도는 물론이고, 어떻게 하면 배우의 연기를 관객에게 더 잘 보여 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연극 자체를 더 돋보이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전달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작가가 원래 쓴 표현과는 다른 표현을 선택할 때도 있다. 나는 그렇게 해야 작품의 의도가 관객에게 더 잘 전달된다는 믿음을 갖고 작업한다. 실제 공연을 보는 관객들이 ‘배우들이 외국어로 말하는 데 내가 왜 이처럼 잘 알아듣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막의 존재를 잊고 배우의 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자막이 최고의 자막이라고 생각한다.”

자막 얘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태풍기담’(성기웅 작, 다다 준노스케 연출)이라는 작품에서는 조선의 공주와 일본인 청년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자 손짓발짓으로 소통하려고 애를 쓴다. 이 장면에서도 처음에는 만들어놓은 자막을 썼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는 자막을 쓰지 말자고 연출가에게 제안했다. 불편하면서 엉뚱한 상황을 관객들이 직접 경험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다 연출이 받아줘서 자막을 없앴는데 나중에 더 재미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2016년 ‘페스티벌 도쿄’ 초청작인 극단 골목길과 남산예술센터 공동 제작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박근형 작·연출)의 한 장면. 일본에는 없기 때문에 한국을 이해시키는 데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가 군대와 군인이다. 더욱이 군대와 군인을 통해 한국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표현하려는 이 연극은 더욱 그렇다. 이시카와는 작가의 의도가 일본 관객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번역을 하고, 자막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대본에 없는 설명을 보강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한다. 사진제공 페스티벌 도쿄(촬영 이시카와 준)

자막의 존재를 잊게 만드는 것이 최고의 자막이라는 철학이 아예 자막을 쓰지 않는 경지로까지 발전한 것 같다.

그의 노력은 2008년 일본 유일의 희곡 번역상으로서 권위를 자랑하는 제15회 유아사 요시코(湯淺芳子)상 수상으로 이어진다. 이 상은 공연된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는데 한국 작품이 이 상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상을 받게 해준 작품은 2007년 그가 번역해서 도쿄에서 공연한 박조열의 ‘오장군의 발톱’이었다. 박조열은 그가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내가 받는 것을 끝으로 상이 없어질 예정이었는데, 그동안 서구 작품에만 주었으니 마지막으로 한국 작품에도 주기로 한 것 같다”며 겸손해 했다.

이 상이 없어진 이후, 일본의 유명 영문학자이자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오다지마 유시(小田島雄志) 교수가 역시 사재를 털어 ‘오다지마 유시 상’을 만들어 희곡 번역가들을 격려하고 있다. 재일동포 3세 배우인 홍명화 씨가 박근형의 ‘대대손손 2016’과 장진의 ‘웰컴 투 동막골’을 번역해 지난해 이 상을 받았다.

4. 한국의 연극, 일본의 연극

그를 인터뷰하면서 두 나라 연극의 차이점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는 2005년 ‘한국에서의 일본연극 수용’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한국 연극인이 일본 연극의 절제된 양식성이나 세부까지 계산된 완성도 있는 연극 만들기와 철저함에 놀란다면, 일본 연극인들은 한국 연극이 가지고 있는 주제에 대한 진솔함, 원초적인 제의성, 역동적인 놀이성, 걸죽하고 진한 삶의 향기 등에 끌린다.”

일본이 정(靜)의 연극이라면, 한국은 동(動)의 연극이라는 것 같다. 그러나 정이든, 동이든 안으로 들어가면 차이는 더 많이 난다.

“한국의 연극은 거대담론이 많은데 비해, 일본은 아기자기한 일상에 철학을 담는다. 일본에서는 60년대부터 본인이 쓰고, 직접 연출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에서는 요즘 그런 경향이 있다. 일본은 연극을 만드는 쪽도 보는 쪽도 층이 두껍다. 연극의 장르도 실험적, 상업적, 사회적 연극 등 매우 다양하다.”

연극인을 양성하는 시스템은 어떤지.

“일본에는 연극영화학과가 많지 않다. 대부분 어깨 너머로 배운다, 도제 시스템이라고나 할까, 장인, 오타쿠 기질이라고나 할까. 다른 일을 하다가 연극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무대 뒤에서 일하는 스태프나 조연출 중에 50대, 60대도 많다. 그래도 존중 받는다. 이에 비해 한국에는 전공출신이 많다. 연극영화학과가 전국에 100개가 넘는다고 들었다. 한국이 일본보다 시스템적으로는 앞서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조연출이나 무대감독이 매우 젊고, 연출이 못된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속칭 ‘시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일 연극 교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일본 연극은 한국에서 많이 공연되는데(매년 20,30편이 공연된다는 기사도 있다), 한국 연극의 일본 공연은 훨씬 적다.

“일본 연극은 삶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 많다. 그에 비해 한국 연극은 사회의 특수성이나 역사와 관련된 것이 많다. 그래서 일본 연극은 배경지식이 없어도 볼 수 있지만, 한국 연극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모르면 보기가 힘들다.”

한국에서는 히라타 오리자, 미타니 고키, 정의신 등의 작품이 많이 공연됐고, 요즘에는 조금 더 젊은 극작가인 이와이 히데토, 마에다 시로 등의 작품이 번역가 이홍이 씨 등에 의해 많이 소개되고 있다.

2005년 이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한국에서 공연되는 일본 작품은 더 늘어났고, 일본에서는 한국의 뮤지컬과 상업 연극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호리프로’라는 곳에서 지난해 이강백의 ‘북어대가리’를 제작해 공연한 것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2016년 일본 도쿄 은하극장에서 공연된 ‘북어대가리’(이강백 작, 구리야마 다미야 연출). 이시카와가 공연을 전제로 다시 번역했다. 일본의 대형제작사가, 후지와라 다쓰야라는 스타배우를 동원해, 한국의 정통희곡을 무대에 올린 것은 처음이어서 화제가 됐다. 북어는 일본어로 ‘다라(たら)’라고 하는데 연극 제목을 ‘다라’를 두 번 겹친 ‘다라다라(だらだら)라고 고쳐서 호평을 받았다. ’다라다라‘는 ’권태롭고 지루하다‘는 뜻인데, 이 연극의 주인공들이 오랫동안 권태롭고 지루한 일을 하고 있는 창고지기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호리프로(촬영 히키지 노부히코)

‘북어대가리’의 일본 공연은 일본의 대형기획사가, 후지와라 다쓰야라는 소속 스타를 기용해, 한국의 정통희곡(정극)을 처음으로 일본 무대에 올렸다는 점에서 화제를 불렀다. 후지와라 다쓰야는 니나가와 유키오 연출의 ‘햄릿’에 출연하는 등 연극 영화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스타로 고정팬이 많고, 티켓파워가 큰 배우다. ‘북어대가리’는 이미 일본어로 번역돼 있었고 제작자가 그걸 보고 기획을 하게 됐지만, 공연을 전제로 이시카와가 다시 번역을 했다.

이강백은 한국에서 동화적, 우화적으로 연출되는 ‘알레고리 작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스타 연출가 구리야마 다미야는 이 작품을 리얼리즘에 충실하게 연출함으로써 각 인물의 캐릭터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또 후지와라 다쓰야는 그동안 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역을 많이 맡았는데, 이 연극에서는 참을성이 많고, 소심하며, 어떤 면에서는 여성적이기까지 한 역을 잘 소화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매력을 보여줬다는 호평을 받았다.

5. 나, 그리고 나의 꿈

이시카와는 “나는 게으르고, 느리고, 소심하다. 요즘 더욱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일을 많이 못한다. 나이들수록 더 겁이 많아지는 것 같다. 젊었을 때는 겁이 없었는데…”라고 말한다.

또 “나는 서투르다. 당장 지금하고 있는 일에 빠져들어 큰 걸 놓칠 수도 있다. 그동안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생각일 뿐이다.

“이시카와는 한국의 연극인들 사이에 까다롭기로 소문이 나 있다. 그 이유는 일을 맡기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하지 않는다. 의뢰받은 작품에 몰입하기 위해서다. 작자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이고 작품을 읽고, 또 그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관련 자료들을 찾아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역을 피하기 위해 몇 번이고 윤색을 한다. 그래서 그녀가 하는 일은 정확하고 믿음직스럽다”(명진숙 한일연극교류협의회 전문위원, 한국연극 2008년 6월호).

그는 요즘 후배들을 위해 번역 기회 등을 양보하는 경우도 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있기는 있는지. 그는 “내가 시작할 때보다는 늘었다”며 이홍이 번역가와 고주영 프로듀서 등의 이름을 들었다.

그렇지만 후배에게 ‘양보’를 한다는 것이 일거리가 넘쳐나거나, 수입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연극계 전체가 어려운데 번역가만 사정이 좋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렵다. 그래서 내 스스로를 외국인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한다. 예전에는 그냥 ‘쥬리’였는데, 나이를 먹어가며 언니, 누나, 선생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내가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직함만 높아지다 보니 어디 가서 일하기가 오히려 더 어렵다.”

그러면서도 그는 “좋은 한국 작품을 많이 번역해서 일본에 소개하고 싶다”는 꿈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요즘은 오는 12월 극단 여행자의 양정웅 연출이 일본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 20주년 기념작으로 연출하는 ‘페르귄트’, 내년 봄 일본에서 초연하는 김민정 작가의 신작 ‘갈애’를 번역하고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국에 온 걸 후회한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한국 연극에 청춘을 바친 그의 선택에 경의를 표한다.

(이시카와 쥬리가 번역한 주요 작품과 출판한 책은 다음과 같다. 일부 작품은 자막도 만들었다. 한국어로 번역=‘억울한 여자’ ‘반신’(성기웅과 공동번역), 일본어로 번역=‘오장군의 발톱’ ‘가모메, カルメギ’ ‘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 ‘목란언니’ ‘태풍기담’ ‘검열언어의 정치학’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북어대가리’ ‘괴벨스극장’, 한국어와 일본어로 번역=‘강 건너 저편에’, 공동번역 및 감수한 책=‘한국현대희곡집1~8권’(2002년~) ‘현대일본희곡집1~7권’(2003년~) ‘정의신 희곡집’(2007년) ‘한국근현대희곡선’(2011년) 등)

심규선 고문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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