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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의 연극인 열전]조명디자이너 최보윤 “조명은 마무리 투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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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의 연극인 열전]조명디자이너 최보윤 “조명은 마무리 투수다”

심규선기자 입력 2017-04-04 11:37수정 2017-04-1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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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윤 조명디자이너는 이미 주목받고 있지만 아직도 젊다. 그래서 자기를 넘어 차세대를 이끌어갈 의무가 있다. 그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조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조명은 작품 전체 속에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매우 특별한 일을 하지만 조화를 지향하는 그의 성격이 그가 만들어내는 빛의 특징인지도 모른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그의 말을 들으며 ‘한 순간에 인생이 바뀐다’는 게 진짜구나, 하고 실감했다.

“95학번으로 연세대 천문대기과학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적성이 맞지 않았다. 다시 공부를 해서 97학번으로 같은 대학의 기계전자공학부에 들어가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3년쯤 다니다가 개인 사정으로 휴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일본 NHK에서 일주일간 매일 정오에 다카라즈카(寶塚) 극단의 가극을 내보내는 프로가 있었는데, 우연히 그걸 보고 완전히 빠져버렸다. 아무래도 화려한 무대와 의상, 노래 등에 끌렸던 것 같다. 특히 시즈키 아사토(姿月あさと)라는 배우의 광팬이 됐다. 처음에는 단원이 모두 여자라는 것도 몰라 남장 여자를 보고 여잔가, 남잔가 하면서 봤다. 야후 등을 뒤져 극단의 성격을 알게 됐고, 일본말도 배워가며 한국 팬들이 만드는 홈페이지에도 들락거리다 운영자까지 됐다. 다카라즈카 오타쿠가 된 것이다. 시즈키 아사토가 극단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마지막 공연을 보러 2박3일 일본까지 갔다 왔다. 그토록 동경하던 실물을 보며 공연 내내 눈물을 흘린 기억밖에 없다. 복학을 했는데 대규모 계단식 강의실이 극장으로 보이고, 교수와 학생들은 배우로 보이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 분위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다시 수능을 보고 01학번으로 한양대 연극영화과의 연출 전공으로 들어갔다. 26살이었다.”

그가 연출을 택한 것은 연기 전공으로는 실기가 약해 언감생심이었기 때문.

“혹시 진로를 바꾼 걸 후회하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똑 부러지게 “안 한다”고 말하는 ‘그’는 누구인가. 연출에서 다시 진로를 바꿔 지금은 조명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린 최보윤 씨(42)다. 3월 30일 동아일보에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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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도 ‘간단히’ 진로를 바꾼 게 여전히 수상하다. 연세대 기계전자공학부라는 간판을 버리고 불확실한 미래를 택한 것도 그렇고.

“집이 학원을 했다. 주산, 속셈, 컴퓨터, 피아노 등등.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컴퓨터를 배웠기 때문에 기계전자공학부에서 그냥 저냥 버틸 수 있었고, 여학생도 드물었다. 졸업을 하면 어디 적당한데 취직을 하던가, 아님 결혼을 하던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생을 바꾸려면 바로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조금 근사한 연극 대사로 바꾸자면 “매너리즘과 단절하지 못하면 존재 이유를 잃어버릴 것 같았고, 그 두려움을 끊기 위해서는 불확실한 미래를 감내해야 했다”는 정도가 될까.

2015년 12월부터 2016년 2월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했던 ‘나무위의 군대’(호라이 류타 作). 적군을 피해 나무 위로 피신해서 2년간을 살았던 두 군인의 이야기. 거대한 벵골보리수가 제4의 배우 역할을 했다. 최보윤 조명디자이너는 그 나무 위로 비추는 조명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환경의 변화, 두 군인의 정서를 암시했다. 최보윤 조명디자이너 제공
연출이 조명디자이너가 된 연유도 들어보자.

“연출은 연극을 만드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를 다 경험해야 한다. 3학년 때 처음으로 조명을 맡게 됐다. ‘젊은 연극제’ 기간이었는데 장소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이었다. 디자인을 할 때는 머리가 아팠고, 셋업할(설치할) 때는 몸이 아팠다. 너무 힘들고 무서웠다. 그런데 공연 첫 날, 오퍼레이팅 실에서 내 손가락 하나로 무대가 밝아오는 것을 보고…”

작은 피조물에 불과한 그가, 더욱이 종교도 없던 그가, “내 손가락 하나로 무대가 밝아오는 것을 보고 마치 천지창조에 버금가는 기쁨을 느꼈다”고 했다. 제대로 꽂힌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그래도 약하다. 아니나 다를까. 2부가 있다.

“나중에 문화일보홀에서 공연한 일이 있었다. 작은 실수를 했다. 그런데 그 극장의 조명감독이 ‘기본도 모르는 애가 조명을 한다’며 엄청 혼을 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아르코예술인력개발원에서 운영하는 무대예술아카데미(1년 과정)를 알게 됐고, 거기에서 스승인 김창기 선생님을 만나 본격적으로 조명을 배우게 됐다.”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아니다. 사실은 ‘조명계의 호메이니’인 김창기 선생님과의 만남이 더 중요하다. 그는 “체계적으로 조명 공부를 하다보니 예전에는 모르고 그냥 하던 일에 서서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최보윤은 요즘 서울 대학로에 사무실이 있는 ‘스테이지워크스(STAGEWORKS)’라는 팀에 속해 있다. 극장이나 극단에 적을 두고 봉급을 받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는 프리랜서다. ‘워크스(WORKS)’라는 복수형에는 (조명팀이 주축이긴 했지만) 2005년 처음 이 팀을 만들 때 무대와 음향팀까지 받아들여 무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해보자는 의지가 담겨 있다. 지금은 조명팀만 있고 식구는 16명이다.

스테이지워크스는 김창기 세대와 최보윤 세대, 최보윤 제자 세대 등 3대가 한 지붕을 이고 산다. 그래서 위아래가 확실하지만,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가족적이기도 하다.

“스테이지워크스가 다른 팀과 다른 점은 상담을 통해 궁극적으로 조명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사람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속감이 높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심하다. 일단 들어오면 어시스턴트(보조자)가 아니라 독립적인 조명디자이너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몇 년 전 정치판에서 유행했던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이 떠오른다. ‘어디를 가든 주인이 되라’, ‘어디를 가든 주인처럼 행동하라’는 뜻인데, 스테이지워크스가 단련 방법이 바로 그렇다. 그 맨 앞에 성공했다는 최보윤 디자이너가 있다. 그는 자신의 어떤 점이 조명디자이너에 맞는다고 생각하나.

“성격이다. 빨리 집중하고, 아니다 싶으면 빨리 털어버린다. 조명은 머리 속으로 아무리 디자인을 잘 해도, 현장에서는 달라진다. 조명을 설치해야 할 극장에서 전날까지 다른 공연을 할 수도 있다. 배우들은 다른 곳에서 연습할 수 있어도 조명은 안 된다. 조명은 공연 직전에 가장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뜻이다. 벼락치기가 필요한데, 그것도 내 성격에 맞는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성격만으로는 못한다.

우선 실력이 있어야 한다. 컴퓨터를 배운 게 큰 도움이 됐다.

“조명은 ‘콘솔’이라는 기계에 컴퓨터프로그래밍을 해야 한다. 대부분 미국이나 독일 기계인데, 어쨌든 기계에는 익숙하다. 조명기를 다는 위치나 조명의 각도 등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해야 한다. 그것도 쉽고 재미있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은 예술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 전 단계는 과학이다. 계속 이과 공부를 해 와 예술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컴퓨터 실력이 그걸 상쇄해줬다.”

‘투명인간’(손홍규 작)은 2014년 9월부터 10월에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됐다. 아버지의 생일날을 맞아 아버지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자는 놀이를 계획한 가족들. 그러나 놀이가 끝도 없이 이어지면서 아버지는 정말로 투명인간이 됐다고 믿어 버린다. 가족해체와 소외가 테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조명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집안 분위기를 의미한다. 최보윤 조명디자이너 제공
다음은 소통.

“프리랜서 디자이너는 공연팀에 들어가 융합해야 한다. 내것만 잘하면 끝나는 게 아니다. 연출과 의견충돌이 있을 수 있다. 극장에서 실제로 구현된 걸 봐야 판단이 서는데, 초기 단계에서는 그걸 보여주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여러 가지 시안을 갖고 가서 설명한다. 설득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설득당할 수도 있다. 내 것이 옳지 않다는 판단이 서면, 금방 내려놓는다.”

그렇다고 연출의 말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5년 전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한 ‘목란언니’(김은성 작, 전인철 연출)의 조명을 맡은 적이 있다. 평가가 좋았다.

“여러 개의 공간들을 열고 닫으며 공간들을 분할하고 재구획한 조명(최보윤)의 기여도 매우 돋보였다. 신속한 장면변환과 스피디한 전개는 조명의 적극적인 고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출과 무대디자인과 조명디자인이 이만큼 조화로운 앙상블에 이른 무대를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김미도 연극평론가, 계간 ‘연극평론’ 2012 여름호, 3월 28일~4월 22일 재공연 팸플릿에서 재인용)

나는 이 글에서 조명이 공간을 만들었다가 없애기도 하고, 극의 스피드까지 결정했다는 대목에서 조명의 역할을 다시 보게 됐다. 지금까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금방 수긍했다.

이 정도의 평가를 받았다면 다음에도 그대로 하는 게 안전하다. 그러나 최보윤은 이번 재공연에서 같은 장소, 같은 연출, 같은 무대디자이너(여신동)와 일하는데도 변화를 줬다.

“‘목란언니’를 다시 하면서 고민을 많이 한다. 예전에는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래서 장식적인 조명도 많이 썼다(장식적인 조명이란 꼭 필요하지 않는데도 뭔가 과시용으로 쓰는 조명이라는 뜻 같다). 연출의 요구가 없어도 나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가 아니라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조명을 꼭 써야 하나, 이게 꼭 필요한가,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지금에 만족해서 레벨을 올리지 않으면, 그냥 이 수준에서 끝나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그는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느냐고 물어줘서 너무 고맙다”고 했다. 요즘 그 화두에 매달려 있다는 뜻이리라. 나는 그 고민을, 조금 진부하긴 하지만, 허물을 벗고 더 크려는 진통으로 이해한다.

그가 한 고민의 결과는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였다.

“‘목란언니’를 처음과 두 번째 할 때는 조금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배우들은 흥겹게 놀지만, 주인공인 목란이 느끼는 차가운 세상도 보여주고 싶었다. 배우가 등장하면 조명은 무조건 배우를 비쳐줘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이번에는 안 비쳐 주고 배우가 어둠 속에서 연기하는 경우도 있다.”

불필요한 조명은 가급적 쓰지 않는 ‘빼기’를 통해 분위기를 바꾸었다는 것인데, 이번에 ‘목란언니’를 직접 보니 그런 것도 같다. ‘그런 것도 같다’고 하는 이유는 이전 공연을 보지 못해 차이를 알 수 없어서다.

조명은 연출과 충분히 소통할 기회가 있는지.

이 대목에서 그는 고 김동현 연출가(전 코끼리만보 대표)를 소개했다.

“처음에는 차가운 인상을 준 선배였다. 그런데 재미있었다. ‘착한 사람 조양규’라는 작품으로 만났는데, 밤늦게 테크니컬 리허설을 할 때였다. 김 연출이 마이크를 들고, 모든 배우 역할을 하는 원맨쇼를 하면서 조명 리허설을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재미있고, 신기해서 엄청 웃었다. 김 연출은 나를 연우(演友), 즉 ‘연극으로 맺은 친구’라고 불러줬는데 그와 함께 한 시간은 ‘배웠다’는 느낌을 줬다. 그때의 유쾌했던 기억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물론 그는 다른 연출도 여럿 언급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조명이 연출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연출이 오히려 조명을 어렵게 생각했는데, 요즘은 조명을 궁금해 하는 연출이 늘고 있고, 배우까지도 조명디자인을 공유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어 반갑다”고 했다.

요즘 조명의 세계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까. 그는 기계와 기술의 발달, 전문 영역의 분화, 새로운 영역의 등장을 꼽았다.

기계와 기술의 발달은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돈이 들어가는 무빙조명기를 많이 쓰지 않았는데 요즘은 많이 쓰고 있다는 것과 필라멘트 조명이 LED로 바뀌고 있음을 말한다. 필라멘트조명은 따뜻한 느낌을 주지만 LED조명은 찬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 둘을 어떻게 믹싱하느냐가 조명디자이너의 성향이자 능력이 됐다고 말한다.

전문 영역의 분화는 연극, 무용, 뮤지컬, 콘서트별로 조명이 전문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연극에 비해 뮤지컬과 콘서트는 조명을 더 많이 쓰는데다, 특히 콘서트는 연습한 대로 조명을 쓰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 사람이 모든 영역을 커버하기가 힘들다.

새로운 영역의 등장으로 첫 손에 꼽히는 것이 영상이다. 예전에는 아예 영상이 없었고, 있어도 정보를 전달하는 보조수단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영상 자체가 극의 중요한 부분으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무대와 영상, 조명의 콜라보레이션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는 말도 한다. 큰 틀에서는 기술의 발달이 무대의 변화를 견인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변화 속에서 그는 일감을 줄이고 공부를 더 할 필요성을 느끼진 않을까. 아주 쉽게 생각해서 그런 질문을 해봤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강한 태클을 받았다.

“그 반대다. 더 많이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일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거기서 배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러니 나는 일을 하면서 고민하겠다.”

그는 수입을 묻자 “먹고 살만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후배들이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단서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기 때문에 그럴 지도 모른다. 또 돈이 별로 안 되는 작은 공연도 많이 받았고, 언제든지 시간 투자도 가능하다. 그러나 남자들은 부담이 클 것이다.”

아무튼 그는 후배를 언급했다. 그는 어떤 선배가 되고 싶은가.

“자극을 주는 선배가 되고 싶고, 롤 모델이 되고 싶다. 후배들에게 ‘쉬는 날 뭐 하느냐’고 묻는다. 힘든 일을 하다보니 대부분이 ‘그냥 쉰다고’ 한다. 그러면 공부를 하라고 한다. 프리랜서는 누구의 뒤에도 숨을 수 없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평가받는다. 아니면 다음에 부르지 않는다.”

그는 후배만이 아니라 후학도 양성하고 있다. 현재 호원대, 한양대, 단국대에서 조명을 가르치고 있고, 그 전에는 경기대, 동아방송대, 목원대, 경희대에 출강했다. 먹고 살만은 하지만 저축까지 할 처지는 못 되는데 대학에서 받는 강의료는 몽땅 어머니에게 송금해 적금을 붓고 있다고 한다.

엄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부모님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연극영화학과에 다시 들어간다고 하자 내 고집을 알기도 하지만 ‘설마’하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막상 합격을 해서 다니기 시작하니까 실망과 걱정이 많으셨다. 졸업하고 거창연극제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부모님이 여행 삼아 오신 적이 있다. 야외극장이어서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 30분 정도 지켜보시다가 들어오셔서는 ‘그래도 남 밑에서 일하는 게 아니구먼…’이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풀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부모님을 실망시킨 것은 그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여동생만 있는데, 그 여동생(39)도 조명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콘서트 쪽이긴 하지만. 이 말을 들으면 당연히 언니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여동생은 언니와 상관없이 조명에 관심을 가졌고 평범한 직장에 다니다가 다른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고 조명디자이너가 됐다. 일을 시작한 시기는 언니와 비슷하다. 둘은 서로 많은 도움을 주고받는다고 말한다(자매의 핏속에 들어있는 ‘조명DNA’는 자식을 탓할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책임지셔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식 사랑이 워낙 크신 분들이라 자식들이 좋다고 하니 속상하셔도 참고 지켜봐 주신 것 같다. 지금은 충주로 귀농을 하셨다. 얼마 전 우리가 최백호 40주년 기념콘서트(LG아트센터)에서 조명을 맡았는데, 티켓을 보내드렸다. 서울로 올라오셔서는 공연보다도 조명콘솔 앞에서 일하는 우리를 보고 더 기뻐하셨다.”

‘우리를 보고 기뻐하시는 부모를 보고 우리가 더 기뻤다’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직업으로서의 조명도 중요하지만 가족의 일원으로서 딸의 위치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가족 4명이 해외여행을 다니는 즐거움을 발견했다. ‘가족’이 그에게는 최고의 조명인 듯싶다.

2011년 10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 ‘벌’은 벌의 집단 폐사사건이 모티브. 벌이 사라진 원인을 찾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각자 안고 있는 고통도 서서히 드러나는데…. 조명은 시골의 한 언덕으로 꾸민 무대에 시간 개념을 넣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최보윤 조명디자이너 제공
여담 한 마디. 그는 일본어를 배워 일본에서 오는 연극관련 스탭들의 통역까지 맡을 정도가 됐다. 물론 일본 방송도 볼 수 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오와라이(お笑い)’다. 두 사람이 서서 말을 주고받으며 웃기는 ‘만담’이다. 장소팔-고춘자, 서영춘-구봉서 콤비를 떠올리면 된다. ‘오와라이’에 연극적이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카라즈카의 화려함에 빠졌던 그가 옛날식 ‘만담’을 좋아한다는 건 약간 의외다.

최보윤은 2013년 제34회 서울연극제 무대예술상(조명), 2016년 제3회 서울연극인대상 스태프상(조명)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도 성장중이다. 그는 어떤 조명디자이너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 하나.

“나는 나랑 일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일을 못하게 만들겠다, 나에게 홀딱 빠지게 만들겠다고 말한다. 조명은 엄청난 성과를 내서 큰 상 하나 받고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연출가들이 ‘저 사람 조명을 꼭 내 작품에 쓰고 싶다’라는 말을 듣는 조명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그렇다고 그는 ‘최보윤 표’ 조명에 갇히고 싶지도 않다.

“한번은 누구한테 ‘보윤 씨 조명은 아기자기하잖아’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짜증이 났다. 내 머리 속 구상이 얼마나 다양한데, 한마디로 규정하다니. 조명에 성격이 안 나타날 수는 없겠지만, 그 성격을 지우고 싶다. 과감한 것은 더 과감하게, 디테일한 것은 더 디테일하게 표현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누가 보고 ‘이거는 보윤이가 한 거네’라고 하면 화가 날 것 같다.”

이는 작품과 장소와 시간에 따라 최적의 조명을 디자인하고 싶다는 프로의 욕망일 것이다. 그는 그런 자세로 일하고 있고, 그에 상응하는 존중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건방지지는 않다.

“조명은 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전체 작품 속에서 평가를 받는다.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나도 관객일 때 조명만을 눈여겨 본적은 없다. 조명은 알아채지 못하지만 영향을 주는 그런 존재다.”

그는 “내가 빛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빛을 끌어 올 수는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는 빛을 만들어 낸다. 구두를 만드는 사람도 가죽은 만들지 못하고, 의상 디자이너도 옷감은 짜지 못한다. 그들은 구두와 옷으로 평가를 받을 뿐이다. 조명디자이너도 마찬가지다. 그가 만들어 낸 빛이 그의 창작품이고, 그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조명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더 있었다면 더 좋은 인터뷰가 됐을 텐데, 하고 말이다(그렇다고 연출이나 배우를 잘 아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조명은 연극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멋진 대답을 했다. 그 대답을 소개하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덮고자 한다.

“마무리 투수라고 생각한다.”

심규선 기자
그렇다. 비록 본인이 승리투수는 아니지만, 그 승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무리투수가 필요하다. 그는 언제라도 그라운드에 나갈 수 있도록, 오늘도 콘솔 앞에서 아이디어를 가다듬고 있다.

(그가 조명디자이너로 참여한 주요 연극은 다음과 같다. ‘목란언니’ ‘나는야 연기왕’ ‘썬샤인의 전사들’ ‘오렌지 북극곰’ ‘댄스시어터 죽고 싶지 않아’ ‘게임’ ‘Bathany, 집’ ‘떠도는 땅’ ‘나무 위의 군대’ ‘비행소년’ ‘알리바이 연대기’ ‘게공선’ ‘강철왕’ ‘히키코모리 밖으로 나왔어’ ‘투명인간’ ‘1984’ ‘템페스트’ ‘거울속의 은하수’ ‘히스토리 보이즈’ ‘말들의 무덤’ ‘나는 나의 아내다’ ‘그을린 사랑’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장석조네 사람들’ ‘벌’ 등)

심규선 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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