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서울!/김은홍]힐링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5일 03시 00분


코멘트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릴 적 외갓집의 풍경은 밤이 되면 하늘에 있는 별들이 땅으로 떨어질 것처럼 가득했고, 따끈한 아랫목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등을 비벼댔던 곳…. 그런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모습….

지금이야 TV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그 풍경들에 대한 향수가 내 나이 또래나 약간 높은 연령대 사람들이 요새 귀농과 귀촌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제 휴식이란 것을 하고 싶다 생각될 때 나도 내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듯이, 모두 자신의 안식을 위해 익숙했던 곳을 찾아 평안을 느끼고 싶어 한다.

봄이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는 이곳은 가로수마저 불그스레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이 산 저 산을 바라보면 거무튀튀했던 곳들이 푸릇푸릇하게 색을 바꾸고 있다. 산과 들뿐만이 아니다. 다들 뭔가 이제 움직여야 할 것 같은 분위기로 부푼 모습을 보이곤 한다. 내 가게 아래층은 오랜 전통시장이다. 한때는 전국에서 제일가는 우시장이 있어 유명했던 곳이며, 시장 사이로 하천이 흐르고 관리가 잘되어 있어 이제 곧 토종 수달이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 때가 되어간다. 그 수달을 보려고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 있곤 한다.

날만 풀리면 바지 걷어 올리고 동네 꼬마 치들과 물고기 잡으며 실컷 논 뒤 빨랫감을 잔뜩 내놓아 어머니께 꾸중 들었던 일, 좁은 골목(그땐 그렇게 커 보였던 그곳)에서 얼굴도 모르지만 나이만 비슷하면 누구나 함께 뛰어놀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어머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에 아쉽게 “내일 또 하자” 하고 헤어졌던 그 고향 동네…. 이런 모습을 어릴 적부터 보아왔기에 각박한 서울 생활이 더 고됐는지도 모른다.

시선을 잠시만 돌려도 꽃에 나무에 사계절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이곳이 너무도 익숙해서인지, 이제는 회색 빌딩이 가득하고, 불빛으로 별도 보이지 않는 그곳이 너무도 답답해 보인다.

힐링이란 것이 비행기 타고 멀리 외국에 다녀오는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가깝지만 자주 만나지 못하고, 사랑하고 고맙단 말 한마디 하기 쑥스러운 분들과 맛있는 식사 한 끼 하는 것, 아홉 살 꼬마로 돌아가 무릎도 한 번 베어보며 잠시나마 푸근함을 느끼는 게 어쩌면 진짜 힐링이 아닐까.

요즘 세상엔 정말 할 일이 너무 많은 게 문제다. 돈벌이는 물론이고 취미도 두어 개는 있어야 한다. 1년에 서너 번은 여행을 가야 하고, 차도 5년쯤 되면 바꿔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문화생활을 해야 하며, 한 달에 두어 번은 외식을 하는 게 평범한 삶이 되었다.

하루하루가 바쁘게만 돌아가서 담장을 타고 올라오는 넝쿨도 볼 수 없고, 길가 돌 틈에 피어 있는 들꽃조차 잡초로만 보일 정도로 뛰어다닌다. 여유는 꼭 고향집에서만 즐길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다. 보도블록 사이에 돋아나는 풀 한 가닥이 누구에게는 그저 죽지도 않는 잡초로 생각되겠지만,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그 풀 한 가닥은 척박한 이곳에서의 생명력이며, 살 수 없는 곳에서 볼 수 있는 인내이고 봄이 될 수 있다.

여유 있는 삶! 어딘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우선이라면 조금이나마 힐링이 되지 않을까.

―김은홍

※필자(43)는 서울에서 일하다가 전북 전주로 옮겨 볶음요리 전문점인 더플라잉팬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시골 풍경#힐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