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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석굴암 원래 모습엔 지금의 목조 전실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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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석굴암 원래 모습엔 지금의 목조 전실 없었다”

조종엽기자 입력 2017-03-24 03:00수정 2017-03-24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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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文전문가’ 최영성 교수 논문 50년 동안 원형(原形)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석굴암의 제 모습을 밝혀 줄 논문이 나왔다. 19세기 말 석굴암 중수 공사를 기록한 상량문을 정밀하게 분석한 것으로 중수 공사 전에는 지금과 달리 목조전실(木造前室) 등 목구조물이 없었다는 내용이어서 학계에 큰 파장이 예상된다. 목조전실의 유무는 석굴암 원형 논쟁의 핵심이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30일 학술 등재지인 ‘보조사상’에 발표 예정인 논문 ‘석굴암 석굴 중수상동문(重修上棟文·1891) 연구’에서 1891년 진행된 석굴암 중수 공사의 성격을 새로 밝혀냈다. 상동문은 상량문과 같은 말이다.

○ “원래는 없던 목구조물, 1891년 새로 세워”


석굴암의 원형은 어땠을까. (1)현재 석굴암의 모습으로 1960년대 공사에서 입구에 목조 전실을 세웠다. (2)1910년경 모습으로 주실 상단에 기와가 덮여 있다. 최 교수는 “1891년 중수 때 새로 덮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3)1910년대 보수한 석굴암의 모습으로 지금과 달리 목조 구조물 없이 개방돼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최 교수는 논문에서 “당시 공사에서 목구조물이 없던 석굴암의 외양을 목조 전각으로 이뤄진 보통 절과 같은 모습으로 변형시켰다”라며 “공사 주체가 유가적(儒家的)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동양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인 상동하우(上棟下宇·위 마룻대와 아래 서까래)를 고집하며 돔 부분에 기와를 얹고 팔부중상이 있는 부분을 목조로 장식한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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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수가 새로 번역하며 주목한 상량문의 내용은 “새로운 모범(新規·신규)을 통해서 초창(草創·사업을 처음으로 일으킴)함이다”를 비롯해 여러 군데다. 그는 “신규, 초창과 같은 표현은 이 불사가 중수 이전의 형태와 다르다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라고 말했다.

1891년 중수 공사의 목적은 “용궁(龍宮)의 제도가 거의 복구되었다. … 대장(大壯)의 송(頌)을…”이라는 상량문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최 교수는 “‘용궁의 제도’는 중국문화권의 전통적 사원 건축 양식인 ‘상동하우’를 가리킨다”며 “‘대장의 송’은 대들보를 놓고, 서까래를 드리운 모양인 주역의 대장괘(大壯卦)를 강조한 것”이라고 했다.

현재 석굴암은 1960년대 보수 공사에서 입구에 목조 전실을 새로 세우고, 팔부중상이 있는 전정(前庭)부 상단도 목구조로 덮은 상태다. 최 교수의 주장이 옳다면 19세기 말의 원형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 “난해한 문체로 주목 못 받아”

상량문은 1924년 일본인 학자에 의해 원문이 공개되고 1963년 목조전실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다시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동안 그 가치에 주목한 이가 드물었다. 1969년 ‘신동아’ 기고로 원형 논쟁을 촉발한 남천우 서울대 교수도 상량문에 대해 “내용이 너무나도 추상적인 표현이고,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건 거의 없다”고 했다.

1960년대 석굴암 공사를 총괄한 황수영 전 동국대 교수(작고·전 동국대 총장·문화재위원장)가 상량문 전문을 해석해 저서 ‘석굴암’(열화당)에 실었지만 주석을 달지 않았고, 별다른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최 교수는 “상량문이 주목받지 못한 건 변려문(騈儷文)이라는 고급 문체로 쓰여 번역이 어려운 특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최치원 연구의 권위자로 2400쪽 분량의 ‘한국유학통사’(전 3권)를 내기도 했던 고문(古文) 전문가다.

상량문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성낙주 석굴암미학연구소장은 책 ‘석굴암, 법정에 서다’(불광출판사) 등을 통해 “상량문은 귀중한 사료임에도 묻혔다”며 “‘도끼질이요 톱질이요(斧彼鉅彼)’ 등의 표현이 목공 작업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고 말했다. 성 소장은 최 교수의 해석과는 반대로 “상량문은 이전의 목조 전각이 허물어진 것을 재건한 사실을 담고 있다”고 봤다.

그러나 최 교수는 기존 번역에 오류가 적지 않다고 했다. 황 교수의 기존 번역에는 “새로운 모범(新規·신규)을 통해서”가 “새로운 규모로”로 돼 있다. ‘규(規)’를 규모라고 본 것이다. 최 교수는 “조선시대 건축 관련 다른 문헌에도 ‘신규’는 새롭게 모범을 세운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제야 겨우 옛 모습(구관·舊貫)에 비길 만하다”고 돼 있는 번역도 최 교수는 “구관(舊貫)은 ‘옛 모습’이 아니라 ‘옛 관례’를 따랐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최 교수는 1891년 중수 공사에서 본존불이 있는 주실의 돔 위쪽에 기와를 새로 덮었다는 것도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상량문의 ‘견보(牽補)’는 ‘견라보옥(牽蘿補屋)’의 준말로 담쟁이덩굴을 끌어다가 새는 지붕을 덮는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라며 “당시 공사에서 기와를 덮었다는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황 교수의 기존 번역에는 이 부분이 “앞으로 계속 보완해야 하리라”고 돼 있다.

○ “1960년대 공사도 원형 벗어나”

석굴암은 20세기 초 주실 천장 앞쪽이 무너지는 등 폐허처럼 변해 가던 것을 1910년대 일제가 보수했는데 지금과 달리 목조전실을 만들지 않았고, 전정부도 개방했다. 하지만 1960년대 목조 전실을 세우자 원형에서 벗어났다는 지적과 그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목조 전실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목조 전각이 그려진 ‘골굴석굴도’ 등을 근거로 내세웠고, 반대 측에서는 이 그림이 인근의 천연 석굴 사원인 골굴사를 그린 것이라고 반박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지금까지 발견된 상량문 이전의 고문헌 중 석굴암에 목구조물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불국사사적’(1708년)에서는 “석불사를 창건하였는데, 토목 공사와는 무관하게 순전히 다듬은 돌을 가지고 짜서 석조감실(石龕)을 만들었다”고 돼 있다.

동아일보를 통해 최 교수의 논문을 미리 본 과학사학자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단언키 어렵지만 논리 전개가 설득력이 있어 큰 신뢰가 간다”며 “19세기 말의 혼란 상황에서 원형을 훼손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는 해석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그동안 학계에서는 상투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많다는 이유로 상량문을 소홀히 여겼지만 이는 변려문의 특성을 모르기 때문”이라며 “1891년 공사에서 본디 노천(露天) 상태이던 전정부를 목조건축으로 장식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 파란만장한 ‘1891년 상량문’ ▼
 
1963년 보수공사 하다가 간이화장실 문짝서 발견
617字 중 160字 잘려나가… 崔교수 “판독엔 문제 없어”

1891년 중수 공사 당시 쓰인 석굴 중수상동문. 동국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최영성 교수 제공
석굴암의 원형에 대한 중요 정보를 담고 있는 ‘석굴 중수상동문’은 일제강점기 보수공사 도중에 발견됐지만 이후 종적을 감췄다가 1963년 보수공사 도중 석굴암 경내의 간이 화장실 문짝에 붙어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최영성 교수가 이번에 상량문 전문을 번역 주석하며 살펴본 결과 본문은 617자인데 처음과 마지막 부분이 잘려나가는 등 확인할 수 없는 글자가 160자다. 최 교수는 “이 부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가 공개한 내용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문리상 판독에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상량문의 작성자는 손영기(孫永耆)다. 최 교수는 “‘와룡암계첩(臥龍庵(결,계)帖·1859년)에 손영기로 추정되는 인물이 소개돼 있다”며 “‘조선국 영남좌도 경주부 동해가(東海上)에 살며 별호를 ‘구지산거사(九芝山居士)’라고 했다”고 밝혔다. 중수공사비를 댄 이는 조(趙) 순상(巡相)이라고 나온다. 최 교수는 “‘순상’은 ‘순상국(巡相國)’의 줄임말로 관찰사 겸 순찰사의 별칭”이라며 “1891년 이전 20년 동안 경상도 관찰사 겸 순찰사를 지낸 ‘조 씨’는 풍양 조씨 세도가 집안의 조강하(趙康夏·1841∼?)밖에 없다”고 말했다.

상량문이 기록한 공사는 석굴암이 아니라 인근 암자의 중수였다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까지 ‘석굴’(현재 석굴암)과 ‘석굴암’(인근 암자)을 구분했고, 상량문은 명칭에서 석굴 중수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최 교수의 이번 논문은 일제강점기 석굴암 보수 공사의 결과처럼 목조전실 없이 전정부를 개방한 것이 옳다고 보지만 당시 공사에서 석굴암을 시멘트로 뒤집어씌우는 등의 잘못까지 옳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석굴암의 원형과 별개로 석굴암의 보존을 위해 최적이 무엇인지도 중요하다. 석굴암이 19세기 말까지 목조전실 없이 개방돼 있던 게 옳다 해도 보존에 악영향을 준다면 전실이 필요할 수도 있다. 목조전실 탓에 통풍이 안 돼 내부에 습기가 차는 현상이 악화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히 검증된 것은 아니다.

197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실사를 통해 “(목구조 공사를 통해) 전실(전정부)의 석상이 비바람에 직접 닿지 않게 됐고, 결빙과 해동의 영향을 받지 않아 보호에 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 성낙주 석굴암미학연구소장도 저서에서 “전실 없이 개방된 구조는 동물이 드나들고 새똥이 쌓이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는 저서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에서 “일본은 석굴암 보수공사를 통해 조선의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키면서 문명화된 일본이 조선의 옛 영화를 되찾아 줬음을 과시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석굴암#최영성 교수#상량문#석굴 중수상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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