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악재’ 경제 흔드는데… 대선주자들은 성장 대신 규제공약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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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대선주자에 작심 제언… 商議 ‘대선후보에 제언’ 왜 내놨나


“쌀가게에서 세계적 자동차 회사를 일군 정주영 신화는 옛이야기가 되는 듯합니다. 포화 상태인 시장, 짙게 깔린 불확실성, 계단을 오를 때마다 턱턱 막히는 보이지 않는 장벽….” (A기업)

대한상공회의소가 22일 내놓은 ‘제19대 대선 후보께 드리는 경제계 제언’이라는 책자의 세 번째 페이지는 취업준비생, 비정규직 근로자, 기업들의 발언들을 담고 있다. 대선 후보들이라면 허울뿐인 경제공약을 만들기보다 재계 현장의 목소리부터 귀 기울여 달라는 의미다.

재계가 이처럼 절박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은 국내 경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서다. 반도체, 석유화학, 중간재 등의 기업들이 좋은 실적을 내고 있지만 ‘반짝 호황’으로 인한 착시효과일 뿐이라는 지적이 있다. 국내 정치 리스크와 대외 돌발변수 탓에 투자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경제 암흑기에 맞닥뜨릴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온다.

○ 벼랑 끝에 몰린 경제계

지난해 11월 검찰 특별수사본부의 삼성 서초사옥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대기업 경영 활동은 사정당국의 칼날 아래 얼어붙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의해 재계 1위 삼성의 총수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됐다. 특검 수사를 이어받은 검찰은 최태원 회장을 포함한 SK그룹 전현직 경영진부터 소환했다. 다음 수사 대상으로 거론되는 롯데와 CJ 외에도 기업들은 “우리라고 타깃이 안 된다는 보장이 없다”며 몸을 사리고 있다.

기업들은 대규모 투자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10대 그룹 한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일부 기업들이 최고 실적들을 냈지만 문제는 3년 후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투자가 ‘올스톱’ 됐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들의 투자가 주춤하면 중소기업들도 성장동력을 잃게 된다. 중소·중견 기업들마저 기업인에 대한 과도한 수사에 공식적으로 우려를 표했던 까닭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외 악재도 이어지고 있다.


정부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따른 중국의 경제 보복은 날이 갈수록 강도가 세지고 있다. 금속업체 B사는 “제품의 90%가량을 중국 현지 공장에서 만드는데 올해 들어 중국 정부가 합당한 이유도 없이 통관에 트집을 잡고 있다”고 토로했다.

전 세계적 보호무역주의 강화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결책이 없다. LG전자와 삼성전자는 연이어 미국 내 가전공장 설립을 발표하면서 ‘트럼프 달래기’에 나섰다. 정작 국내 일자리 창출을 위한 투자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 제대로 된 정치적 리더십 절실

재계에서는 차기 정부의 ‘경제 리더십’에 한국 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대선 주자들도 경제 관련 구상을 속속 내놓고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 성장 해법보다는 규제를 앞세운 ‘재벌 개혁’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올 1월 “우선 10대 재벌에 강력한 규제를 도입하고 그중에서도 4대 재벌 개혁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재명 경기 성남시장은 ‘재벌 해체’를 주장하고 있다. 다른 대선 후보들도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주요한 경제개혁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10대 그룹 한 임원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한 내부 검토들이 속도를 내고 있었는데 최순실 사태 이후 모든 논의를 멈췄다”고 말했다. 반기업 정서가 워낙 커져 기업 스스로 마련한 지배구조 개선 방안은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볼 우려가 커서다. 검찰 수사가 전방위적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지배구조 개선에 쉽게 손을 대지 못하는 이유다.

기업인들은 제언문에 “지배구조는 꼭 바꿔야 한다”면서도 “방법은 시장경제 안에 있다”고 적시했다. 가령 소액주주 또는 근로자 대표의 이사회 진출을 의무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은 주식회사의 기본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제도 개선’에만 집중하기보다는 ‘공정하고 일관된 집행’에 힘써야 할 때라는 목소리도 담았다.

재계는 “한국 경제는 두터운 ‘불신의 벽’에 갇혀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기업을 믿지 못하다 보니 ‘이건 해라, 저건 하지 말라’며 일일이 규제하고 정치권은 대립 프레임에 갇혀 오늘도 공전 중이라고 꼬집었다. 기업들이 규범을 뒷전으로 밀어둔 채 실적만 챙기고 있다는 반성도 빼놓지 않았다.

‘기득권 내려놓기’도 주요한 제언으로 거론됐다. 불공정거래를 반복하는 기업, 성과에 비해 과도한 임금을 상시적으로 요구하는 노조, 자격증을 방패 삼은 고부가가치 서비스 부문 등을 예로 들었다.

대선 후보들이 수많은 일자리 공약을 발표해 왔지만 제대로 된 노동개혁 정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제언문은 “비정규직이라 받는 불이익, 정규직이라 당연시되는 기득권을 함께 조정해 높이를 맞춰야 한다”고 썼다.

○ 10년, 100년 내다본 계획 세워야

경제계에서는 대선이 급박하게 치러지는 만큼 경제 밑그림과 정책이 근시안적으로 마련되지는 않을지 불안해하고 있다.

이동근 대한상의 상근부회장은 “정치 시계가 빨라지면서 대선 후보들이 자칫 ‘선명성 함정’에 빠질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또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국가 전체적으로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 만큼 한국 사회와 한국 경제의 현실을 잘 진단하고 미래 비전과 해법을 설정하는 데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기업들은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기존 정책이 조용히 사라지는 ‘새 정부 신드롬’도 우려하고 있다. 정책 시계가 5년이 아닌 10년, 100년을 내다보고 이뤄져야 기업이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언문에 “미래 예측 가능성을 위해 현재 정부의 좋은 정책은 정책 일관성 차원에서 계속 유지, 발전시켜 달라”는 내용이 담긴 이유다.

제언문 작성에 참여한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제에 대한 안정성이 확보돼야 미래 예측가능성도 높아져 기업들이 사업을 벌일 수 있다”며 “차기 정부는 일관적으로 정책을 펴 경제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샘물 evey@donga.com·서동일 기자
#대선#경제#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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