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도시락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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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낯선 도시로 가서 살게 되었을 때, 한 에디터가 도시락 통 하나를 선물로 준 적이 있다. 단순한 직사각형 디자인과 옥색 빛깔이 무척이나 세련됐지만, 2단짜리 도시락인데도 밥과 찬을 담기에는 너무 작아 보여서 한참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던 게 생각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3, 4학년부터 도시락을 싸갖고 다녔던 것 같다. 교실 한가운데 조개탄 난로가 있었고, 그 위에 양은 도시락들을 차곡차곡 올려 두었다. 밥이 눌어붙는 구수한 냄새로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걸 알았다.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 때라 반찬은 늘 김치에 멸치볶음, 콩자반, 어쩌다 달걀 프라이나 소시지 부침. 도시락을 못 싸온 친구가 있으면 허물없이 불러 나눠 먹었고, 혼식을 장려하던 해에는 밥에 보리를 섞어서 싸왔는지 선생님이 일일이 검사하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게 까마득하지만. 그러고 보니 내 모친은 수년 동안 아침마다 세 개나 되는 도시락을 싸야 했을 것이다. 두 살 터울의 딸들이 셋 있으니까. 어머니가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넣고 싸준 단무지 무침은 친구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버클리에서 지낼 때 그 대학 한국학센터 직원과 가깝게 지냈다. 그녀의 남편이 사키야마 씨였는데 한국에서 작고 소박한 식당을 차리는 게 꿈이라고 들었다. 그 집에서 저녁을 먹을 적마다 사키야마 씨의 요리 솜씨에 매번 감탄하곤 했다. 어느 을씨년스러운 날, 그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갑자기 내 숙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공휴일이라 주변 식당들은 다 문을 닫은 데다 그즈음 내가 식욕을 크게 잃은 채 지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을까. 도시락을 내밀면서 그녀가 말했다. 일부러 싼 게 아니라 점심에 먹으려고 만든 음식이 많아 챙겨온 거니까 절대 부담 갖지 말라고.

간간한 닭조림, 달걀말이, 각종 야채절임, 흑임자를 뿌린 고슬고슬한 밥…. 그 도시락만큼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책상에 앉아 혼자 침묵 속에서 꼭꼭 씹어 먹던 따뜻한 밥의 맛과 도시락을 만들고 전해 주러 자동차를 몰고 온 그 가족의 마음을. 어쩌면 지금은 잊고 있지만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 그 비슷한 마음이 담긴 도시락을 받아오면서 성장했고 어려운 시간을 건너왔을지도 모른다.

조카들이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는 수요일 오늘은 불고기김밥을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다. 조카들은 김밥이라면 집에서도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각자의 도시락에 담아 먹는 것을 좋아한다. 어른들을 위해서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썼던 오래된 찬합에 김밥을 담아볼까. 도처에서 꽃 소식이 들리니 한 번쯤 맛있고 보기도 좋은 도시락을 정성껏 싸고 싶다. 만든 것이든 받은 것이든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에는 저절로 이런 소리를 하게 되지 않나. 잘 먹겠습니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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