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우리는 여왕을 뽑았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2일 23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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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의 파면 결정 승복 대신 “진실은 밝혀진다”는 박근혜
나라는 안중에 없었나
민주주의 배운 바 없는 박정희 대통령의 딸
여왕은 헌법 위에 있어도 대한민국은 法治로 가야 한다

김순덕 논설주간
김순덕 논설주간
결국 승복 발언은 없었다.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심판을 통한 대통령 파면. 박근혜 전 대통령(이하 경칭 생략)은 헌재 결정 이틀 만에 청와대를 떠나며 침묵보다 못 한 폭탄을 던졌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는 무서운 시한폭탄이다.

불복 투쟁 독려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그가 받은 충격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이 ‘비선 실세’라고 부르는 최순실의 잘못을 몰랐던 것만 제외하곤 모든 건 선의였고 애국심이었다.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탄핵은 기각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던 게 분명하다.

2012년 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았던 국민도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러나 태극기를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말조차 하지 않은 건 지지자들 가슴에 불을 지르는 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의 애국심만큼은 의심하지 않았지만 나라를 걱정한다면 이럴 순 없다. “헌재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건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13년 전 제 입으로 말했던 박근혜다. 당장 북한 김정은을 만난다고 발표해도 나라를 팔아먹진 않을 사람으로 믿기에 2012년 대선 때 최순실의 존재를 알았더라도 야당 후보 아닌 박정희-육영수의 딸을 찍었을 거라는 국민이 적지 않다. 정권이 바뀌면 안보도 흔들릴까 봐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것을 순전히 자신에 대한 지지로 안다면 착각이다.

그러고 보면 박근혜는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다. 세월호 참사 때 떠밀리듯 대(對)국민 사과를 한 것을 빼고는 국회가 마비되는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키고도, 공직기강을 무력화시킨 세종시 원안을 밀어붙이고도 반성한 적이 없다. 특히 최순실 일가와 관련해선 눈꽃처럼 결백하다. 2002년 한 인터뷰에선 “육영재단 이사장을 물러날 때 동생과 직원들이 최태민(최순실의 부친)의 전횡을 지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육영재단이 얼마나 잘되고 있었는데 나쁜 일 한 게 있었겠느냐”고 반문했을 정도다.

대통령 탄핵을 초래한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박근혜의 인식은 그때 육영재단과 다르지 않다. 헌재가 ‘최순실의 사익 추구에 대통령이 관여하고 지원했다’고 판단했음에도 그는 “진실은 밝혀진다”고 사실상 불복을 선언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검증 때 최태민에 대해 구체적 증거자료를 놓고 묻는데도 한사코 부인했던 것과 똑같다. “증거가 있는 건 인정해야 신뢰감을 줄 것 아니냐”던 그때의 개탄이 다시 나올 판이다.

숱한 증인들이 있는데도 단호하게 그런 사실이 없다는 박근혜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사실을 은폐하고, 은폐를 지적하는 국회와 언론을 거꾸로 비난한 헌법·법률 위배 행위가 중대한 탄핵 사유라는 헌재를 부정하란 말인가. 나는 박근혜가 거짓말을 한다고 보진 않는다. 거짓말이란 ‘사실’과 다른 말로 상대를 속이는 것인데 그는 그런 ‘사실’ 자체가 없다고 믿는 것 같다. 최순실의 마술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머리를 쥐어뜯은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박근혜가 정치인 롤모델로 꼽았던 엘리자베스 1세 영국 여왕(1533∼1603)을 떠올리고 나서다. 여왕을 처음 본 런던 시민들은 깜짝 놀라 “맙소사! 여왕이 여자라니!” 외쳤다고 한다. 맙소사, 박근혜는 여왕이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불행을 겪어 봐서 남을 배려할 줄 알고, 관용으로 국정을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2012년 말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자신은 남을 배려할 줄 몰랐다. 서출인 엘리자베스는 어렵게 왕좌를 얻은 까닭에 통찰력 있는 참모들을 모아 더 큰 영국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의 딸이었던 박근혜는 엘리자베스보다 태어날 때부터 왕관을 쓰고 태어나 그걸 자기 머리카락처럼 느끼는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 여왕과 더 닮았다.

우연이 역사를 좌우한다면 운명을 좌우하는 건 천성이다. 여왕으로 나서 자랐으니 법도 우습다. 그래서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 암살 기도 혐의로 영국의 법정에 섰을 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조차 모조리 부정했다. 군주는 절대 오류를 범하지 않으니 자신이 잘못한 사실조차 기억에서 없애버리고는 왕도 재판을 받을 수 있고 처형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준 여왕이 됐다.

‘박정희 신화’를 못 잊어 독재자의 딸을 여왕으로 뽑은 것은 국민이었다. 그가 헌재를 부정함으로써 일말의 안타까움도 갖지 않을 수 있게 됐다. 박근혜와 함께 한 시대가 갔다. 이제 여왕, 아니 왕 같은 대통령은 다신 이 땅에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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