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語, 간판이 말을 거네” 길 위 사유의 시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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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어장/이일훈 지음/352쪽·1만5000원·서해문집

제목부터 언어유희다. 상상어장의 ‘어장’이란, 단어를 보자마자 떠오르는 ‘고기잡이를 하는 곳’이 아니라 말의 장, ‘어장(語場)’이다. 건축가이자 수필가인 저자가 간판과 안내문, 표지판, 현수막 등 일상에서 언제든 볼 수 있는 ‘말’들을 보고 떠올린 사유들을 적었다.

가령 건물의 벽에 찍힌 ‘건물주’란 간단한 단어에선 어렸을 적 친구들과 나눴던 장래 희망을 떠올린다. 선생님, 과학자, 경찰관이 되고 싶어 했던 오래된 시절 아이들. 그런데 요즘 초등학생들 중에는 건물주가 되겠다는 아이도 있단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나.

‘이곳에 주차 시 경인조치합니다’란 안내문이 있다. ‘경인조치’가 견인조치를 잘못 쓴 말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자는 ‘경인’의 다양한 의미를 찾아본다. ‘경인(京人): 서울 사람. 이곳에 주차하면 서울 사람이 된다는 말인가’ ‘경인(經印): 도장을 찍음. 이곳에 주차하면 차에 무슨 도장을 찍겠다는 말인가’ ‘경인(庚寅). 갑자, 을축, 병인 등 육십갑자. 이곳에 주차하면 경인생 팔자로 바뀐단 말인가’…. “잘못 쓴 글자 하나가 사전을 찾게 하니 나름 글자 구실 한번 한 셈”이라는 작가의 얘기에선 발표 당시부터 논란이 컸던 서울시 도시브랜드 ‘I·SEOUL·U’, 저자 역시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모호하다면서 ‘너와 나의 서울’이라고 설명하지만 ‘나는 나, 서울은 서울, 너는 너’라고도 읽히지 않느냐고 비튼다.

날마다 만나지만 무심히 지나쳤던 언어들 속에 이렇듯 재미와 사유가 깃들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에피소드마다 사진도 함께 실어 읽는 맛을 돋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상상어장#이일훈#말#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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