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이윤재]영어안내문, 제대로 적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조선의 궁궐과 왕릉 어디에나 있는 ‘금천교’는 보통명사이면서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궁궐에 들어갈 때 정문이나 왕릉에 들어갈 때 홍살문을 지나면, 냇물이 있는데 이를 금천(禁川)이라 하고, 그 위의 돌다리를 금천교(禁川橋)라 한다. 창덕궁의 금천교는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금천교는 옥천교(玉川橋), 경복궁의 금천교는 영제교(永濟橋)라는 고유의 이름을 붙였다. 경희궁과 덕수궁은 그냥 금천교(禁川橋)라 하여 보통명사를 고유명사화하였다.

안내판이 있는 곳은 영릉(英陵·세종대왕 능)이 유일하다. 문화재청이 세운 안내판은 ‘금천(禁川)’을 ‘Forbidden Stream’으로, 금천교를 ‘Forbidden Stream Bridge’로 번역해 놓고 있다. 아마 중국 ‘자금성(紫禁城)’을 참고한 듯하다. 그러나 금천교와 자금성의 개념은 전혀 다르다. ‘자금성’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백성의) 출입이 금지된 자줏빛 성’이다. 영어로는 ‘자(紫)’를 무시하고 그냥 ‘Forbidden City’라 한다. ‘紫(자)’는 ‘자미성(紫微星)’이라는 북두칠성의 북쪽에 있는 별을 가리킨다. 중국 사람들은 이곳에 천제(天帝)가 사는 천궁(天宮)이 있다고 믿었다.

‘forbidden fruit’(금단의 열매)와 ‘forbidden ground’(금단의 장소)처럼 ‘Forbidden Stream’은 ‘마실 수 없는 냇물’ 혹은 ‘들어갈 수 없는 냇물’이란 의미가 되며, ‘Forbidden Stream Bridge’는 ‘건너서는 안 되는 냇물의 다리’가 된다. 건너는 것이 금지된 냇물에 웬 다리란 말인가. 적절한 번역은 ‘Bridge for Purification’일 것이다. ‘정화교(淨化橋)’ 또는 ‘재계교(齋戒橋)’라는 의미다.

이런 의미의 왜곡은 ‘금천(禁川)’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금천’이란 ‘출입이 금지된 냇물’이 아니라 ‘(사악한 마음을) 금하는 냇물’이란 의미이다. 영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우리의 문화를 세계에 제대로 알려야 한다. 정확성과 섬세성을 무시해버리면 결국 고품격 문화는 없어지고 만다.

이윤재 ‘말 속 인문학’ 저자
#금천교#영릉#금단의 열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