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못 속여… 해외 입양인, 한국어 학습능력 탁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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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서 모국어 기억 연구 최지연씨

2014년 6월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최지연 박사(오른쪽)와 지도교수인 앤 커틀러 교수(왼쪽)의 모습. 최박사는 한국인 입양인들의 모국어 기억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으로 한국인 최초의 막스플랑크 심리언어학연구소 출신 박사가 됐다. 최지연 연구원 제공
2014년 6월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최지연 박사(오른쪽)와 지도교수인 앤 커틀러 교수(왼쪽)의 모습. 최박사는 한국인 입양인들의 모국어 기억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으로 한국인 최초의 막스플랑크 심리언어학연구소 출신 박사가 됐다. 최지연 연구원 제공
“한국인 입양인들의 머릿속엔 한국어에 대한 짙은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나무에 새긴 나이테 같은 기억인 셈이죠.”

지난달 28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에서 만난 최지연 박사(34·음성과학-심리언어실험실 연구원)는 네덜란드에서 만난 인연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는 네덜란드 막스플랑크 심리언어학연구소에 재학하던 2010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 출신 입양인 29명을 만나 모국어 기억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최 박사가 네덜란드 전국을 누비며 만난 입양인은 생후 3∼17개월에 네덜란드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난 사람들이다. 한국에 대한 기억은 물론이고 한국어 능력도 전무한 상태였다. 최 박사는 이들의 집을 방문해 입양인과 그들의 네덜란드인 형제, 친구들에게 한국어 음소(音素) 교육을 했다. 음소는 ‘살’과 ‘쌀’의 ㅅ과 ㅆ처럼 단어의 의미를 구별하는 언어의 최소 단위를 말한다.

10일 뒤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같은 교육을 받았지만 입양인의 한국어 능력이 월등히 나아진 것이다. 외국인들은 한국어의 평음(ㅂ), 경음(ㅃ), 격음(ㅍ)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입양인들도 처음엔 마찬가지였지만 학습 후엔 음소를 명확히 구분해 좀 더 ‘한국인 같은’ 발음을 냈다.

최 박사는 “한국을 아예 잊은 채 살아가는 입양인이라도 모국어 소리에 대한 지식을 기억하며, 그 기억이 학습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연구로 2014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한양대로 자리를 옮겼다.

최 박사는 이후 입양인과 네덜란드인의 발음을 녹음한 파일을 한국 사람들에게 들려주며 ‘한국 사람의 발음으로 들리는지’ 평가하는 실험을 하는 등 연구를 보강해 논문을 펴냈다. 이 연구는 세계적 학술지인 ‘영국왕립학회지’ 올해 1월 18일자에 실렸다.

입양인들을 만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네덜란드 한국인 입양인 모임 ‘아리랑’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처음엔 입양인의 상처를 건드릴까 우려된다며 거절당했다. 모임 실무진을 만나 수차례 연구의 의미를 설명하며 설득한 후에야 인터넷 사이트에서 모집을 시작할 수 있었다. 최 박사는 “입양인들은 과학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동기로 연구에 참여했겠지만 아마 같은 한국인이라는 점도 경계심을 풀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험이 끝난 뒤 최 박사는 입양인의 집에서 빈대떡이나 비빔밥 같은 한국 음식을 해주며 한국 문화를 교류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한국 도장이 찍힌 엽서를 보내며 한국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간직할 수 있게 돕기도 했다. 최 박사는 “연구 도중 간혹 ‘왜 부모가 날 포기했을까. 한국 사람으로서 왜 내가 버려졌을 것이라 생각하냐’고 물어오는 입양인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 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입양 후 2년가량 지나면 입양인들은 ‘모국어가 소통에 쓸모없다’는 것을 알아차려 빠르게 잊어버린다는 게 학계의 통념이다. 최 박사는 “영유아들이 예상보다 빨리 언어를 습득하며, 이를 사용하지 않은 채 20∼30년이 지나더라도 음소 형태로 기억에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권예슬 동아사이언스 기자 yskwon@donga.com
#네덜란드#언어 연구#최지연#해외 입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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