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나를 키운건 9할이 달동네 골목”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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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도시에서 나는 끝내 밀려나고야 말테지만 그래도 그 전에, 골목 갈피의 기억 끄트머리를 하나라도 붙잡고 싶었다.”―‘뜨겁게 안녕’(김현진·다산북스·2011년) 》
 
대학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이사를 했다. 목적지는 서울 외곽 어디쯤이었다. 원래 지인이 반전세로 살던 곳. “계약기간이 1년 남았는데 내가 먼 곳에 가니 대신 들어와 지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냉큼 받아들였다.

처음엔 매우 만족했다. 방 2개에 시장이 지척이고, 전철역도 가까웠다. 지긋지긋한 대학 앞을 떠나 새로운 마음으로 취업 준비를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만족은 아쉽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 집에는 부족한 게 있었다. 햇빛이었다. 계단 서너 개가 있는 1층인데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불을 켜기 전까지 캄캄했다. 반지하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안방의 창문은 제대로 열리지 않을 정도로 뻑뻑했다.

밤마다 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웃에 노래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아저씨들은 ‘옥경이’ ‘선희’를 제 누이처럼 연방 불러댔다. 교회 십자가 불빛마저 안방 창문을 통과하면 이발소 회전등처럼 어지러이 흩어졌다. 그런 방안에 있으면 축 처지곤 했다. 서울의 어두운 구석 한가운데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우울함 때문이었을까. 그 동네를 떠난 뒤로도 한동안은 그곳의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였을까. 김현진의 ‘뜨겁게 안녕’을 읽는 내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재개발 직전의 달동네들, 누군가에겐 지우고 싶은 지긋지긋한 기억일 뿐인 그런 골목들을 행여 사라지더라도 기억하고 싶다며 글로 끄집어내는 따뜻함 때문이었다. 비 오는 날이면 하수구로 역류하는 흙탕물을 퍼내고, 990원짜리 ‘한솥도시락’ 콩나물밥을 지겹게 먹을 만큼 가난했어도 그는 서울의 그 골목들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이모네곱창’ ‘나주순대국’ ‘들불호프’…. 그의 표현대로 ‘성장촉진제를 맞은 것처럼 광포하게 확장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이곳들은 그나마 고단함을 감싸주는 거처가 되어줬던 모양이다.

돌아오는 주말 오후. 이태원 경리단길도 좋고 해방촌, 연남동을 찾는 것도 좋지만 하루쯤은 지금 사는 동네를 천천히 둘러볼 생각이다. 내 고단함도 감싸줄 ‘이모네곱창’ 같은 곳이 분명 이 동네에도 하나쯤은 있을 테니.

박창규 기자 kyu@donga.com
#뜨겁게 안녕#김현진#다산북스#달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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