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비선조직 운영한 정조, 편향성 막는 데 활용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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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창문이 구름을 밀치는 저녁, 함지가 해를 떠받드는 가을, 백 년 동안 이 모임을 길이 하리니, 덕과 함께 복도 함께하리라.”

이 시는 조선 후기인 1778년 정조(1776∼1800년 재위)가 작성한 ‘동덕회(同德會)’란 제목의 시다. 동덕회는 정조가 만든 일종의 비선 조직 이름이기도 하다. 이 모임의 구성원은 서명선 홍국영 정민시 김종수 이진형으로, 모두 영조 말년에 위기에 빠진 정조를 보호한 인물들이다.

1775년 11월, 영조는 세손인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실권자였던 좌의정 홍인한, 정후겸 등의 반대에 부닥쳤다. 홍인한은 “세손은 누가 노론인지 소론인지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도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더구나 알 필요가 없다”며 드러내놓고 세손을 배제했다. 바로 이때, 서명선이 홍인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홍국영 정민시 이진형 등이 같은 편에 섰다. 김종수 역시 드러나지 않게 정후겸 세력을 공격했다. 결국 오랜 논란 끝에 영조는 홍인한을 처벌했고 정조는 대리청정에 들어갔으며 다음 해 영조가 사망하자 즉위했다.

1777년 12월, 서명선이 홍인한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린 날(1775년 12월 3일)을 기념해 동덕회가 조직됐다. 이후 동덕회는 정조가 사망하기까지 20년 이상 같은 날에 만나 모임을 가졌다. 모임 형식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정조가 따로 글을 지어 내리고 개별적으로 선물을 주는 등 각별한 애정을 보이며 특별히 예우했다. 단적인 예로 정조의 외척이었던 홍국영의 경우, 후궁으로 만든 누이동생(원빈 홍씨)의 죽음 뒤에 효의왕후의 사주가 있었다고 의심해 왕비 독살 시도까지 벌였지만, 신하들의 집요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역적 처분만은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조는 비선 조직을 어떻게 활용했을까. 동덕회는 분명 정조가 믿고 의지했던 측근이었지만 각각의 당색은 달랐다. 예를 들어 김종수와 홍국영은 노론 시파(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였지만 서명선, 정민시는 소론(영조 대신 경종을 지지)이었다. ‘군왕이란 현명한 신하와 사적인 정을 쌓아야 큰일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정조는 생각이 서로 다른 동덕회 멤버들 각각과 별도의 라인을 만들어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경로로 취합한 정보를 근거로 노론 벽파(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영조의 처분을 지지)의 영수 역할을 했던 심환지에게 지시를 내리곤 했다. 한마디로 정조는 비선 조직으로부터 사전에 얻은 정보를 토대로 각 당의 정치적 이견과 입장을 조율하기 위해 노력했다.

현대 기업이나 여러 조직체에서도 비선 조직의 운영 사례를 자주 접하곤 한다. 그런데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정보를 무시하는 ‘확증 편향’에 빠진 리더들이 많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편향에 빠진 사람들일수록 비선 조직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경우가 잦다는 점이다.

비선 조직의 존재 자체가 부정돼야 하는 건 아니다. 관건은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비선 조직은 공적 시스템과 공적 판단을 뒷받침할 수 있는 형태로 운영돼야 한다. 측근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판단하고 결정할 게 아니라, 다양한 입장을 폭넓게 수용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리더십이 필요한 때다.

노혜경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hkroh6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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