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되풀이되는 후진국형 가축 전염병 막으려면…‘가축 방역 징비록’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3일 16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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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16일 시작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가 23일로 100일째를 맞았지만 정부는 아직 ‘AI 종전 선언’을 못하고 있다. 22일 전남 해남군의 육용오리 농장에서 고병원성 AI 확진판정이 나오고, 같은 날 충남 청양군에서도 의심신고가 들어오는 등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 100일 동안 AI로 도살된 가금류가 3300만 마리에 이른다. 경제적 피해규모는 1조 원이나 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달 초 구제역까지 퍼지면서 대한민국은 가축질병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지만 전쟁수행 과정에서 많은 허점을 드러냈다. 매년 되풀이되는 방역실패를 막기 위해 ‘가축 방역 징비록(懲毖錄)’을 쓴다.
●‘영관급 장교’가 작전사령관…봉화도 꺼져

이미 한국은 후진국 형 가축 전염병의 온상이 됐다. AI는 2003년 국내에서 처음 발생한 이후 2~3년 주기로 발생하다가 2014년 이후부터는 매년 창궐하고 있다. 1934년 종식된 것으로 여겨졌던 구제역은 2000년 다시 등장했다.

매년 전시상황이지만 전쟁을 지휘하는 전담조직은 턱없이 허약하다. 방역정책은 농림축산식품부 축산정책국의 방역관리과(13명·AI)와 방역총괄과(10명·구제역)가 맡는다. 4급 과장이 국가최고수의전문가(CVO)를 맡고 있는 나라는 사실상 한국뿐이다. 전면전 상황에서 영관급 장교가 작전 사령관을 맡는 셈이다.

축산진흥을 담당하는 축산정책국 산하에 있다보니 방역업무는 뒤로 밀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AI가 확산된 뒤 며칠이 지난 주말에 이동중지명령(스탠드스틸)이 발령되기도 했다.

지시와 보고체계도 허술했다. 정부는 구제역이 발생한 뒤 백신을 어디에 얼마나 접종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봉화가 꺼진 것이다. 전무형 대전충남수의사회장은 “백신을 사 갔다는 기록만 있으면 ‘접종농가’로 분류하고 접종했기만을 기대하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허약한 방역 전담조직은 최고 지휘부의 무능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11월 16일 첫 AI 의심신고 이후 범정부 관계장관 회의가 열리는 데 26일이나 걸렸다. 지난해 11월 28일 AI가 발생하자 2시간 만에 총리 주재 각료회의가 열린 일본과 극명하게 대비됐다.

채찬희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예산과 권한이 적은 과장급이 상황을 총괄하다보니 상부로 보고할 기회조차 잡기 쉽지 않다”며 “적어도 국 단위의 전담 방역조직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전투 병력 부족, 기율도 엉망


실제 전투가 벌이지는 방역현장에서 일할 인력인 지휘관과 병사가 턱없이 부족하다. 현장 지휘관 역할을 해야 할 지방자치단체의 가축방역관은 660명으로, 농식품부가 진단한 적정인력(1283명·2014년 한국능률협회 연구)의 절반에 그친다. 그나마 아예 1명도 없는 지자체도 70곳에 이른다. 일본은 수의사만 현당 44명으로, 모두 2000명이 넘는다.

특히 매년 반복되는 가축질병으로 방역업무를 기피하는 현상이 심화돼 정원조차 채우기가 쉽지 않다. 지난해 초 한 광역지자체는 수의사 21명을 채용하려 했지만 지원자가 없어 3명을 충원하는 데 그쳤다.

예비군도 태부족이다. 방역이 시작되면 타 부서 공무원, 농·축협 관계자를 끌어 모으고, 외국인 노동자까지 고용해 살처분을 진행하는 식이다. 평소에 훈련이 안 된 사람들을 급하게 불러 모으는 것이다. 농림축산검역본부 역학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음식점 배달원이 제지 없이 방역 현장을 드나들 정도로 출입관리가 허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지자체 방역인력을 보강하는 한편 유사시 동원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윤종웅 가금수의사회장은 “미국은 수의사, 수의대 학생 등을 중심으로 5000여 명의 상시수의예비군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뒷문 뚫린 전선…해이한 안보의식

농가의 도덕적 해이도 문제로 꼽힌다. 일부 농장에서는 예찰이나 검사를 위한 공무원의 진입을 거부하기도 했고, 지난해 12월에는 농장에서 AI 의심 신고를 하기 직전에 닭과 달걀을 출하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기도 했다. 해이한 안보의식으로 후방이 털려 게릴라들이 마음 놓고 활보하는 꼴이다.

전문가들은 축산 농가 스스로 자신의 재산을 지키겠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농가의 책임방역을 기본으로 하되 정부가 교육, 시설, 점검 등의 지원을 통해 방역을 상시화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농장 단위에서 해야 할 일을 명확히 명시하고, 홈페이지를 통해 이행 여부를 공개한다. 신고 체계도 잘 갖춰져 있다. 이상 증상 등 질병 발견 때에만 신고하게 돼 있는 한국과 달리 평소에도 정기적으로 폐사율을 보고한다.

농가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취지의 현행 보상금 제도가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방역 당국의 한 관계자는 “일본은 원가로 보상하는 데 비해 우리는 시가로 보상한다”며 “차등 보상제 도입 등의 방안을 강구해 농가의 방역 책임을 높여야 한다”고 밝혔다. 농가에서 수의사와 긴밀히 협조해 질병예방과 치료에 나설 수 있도록 일종의 ‘가축의료보험’을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휴전’을 ‘종전’으로 착각…땜질 처방 반복

발병하면 호들갑을 떨다가 기온이 올라 바이러스가 사라지면 손을 놓는 것도 문제다. 휴전(休戰) 상태를 종전(終戰)으로 착각해 평시 대비태세를 게을리 하는 셈이다.

겨울에 질병이 발병하면 봄에 대책을 내놓는 방식이 수년째 되풀이되고 있다. 거의 해마다 △가축 방역 체계 개선 및 축산업 선진화 방안(2011년 3월) △AI 및 구제역 재발 방지 종합 대책(2013년 5월) △AI 방역 체계 개선 방안(2014년 8월) △가축 질병 방역 체계 개선 방안(2015년 6월)으로 이름만 바꿨을 뿐 내용에선 진전이 거의 없었다.

기껏 내놓은 방역 대책대로 실행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2014년 농식품부는 ‘AI 위험지구’를 지정해 축사시설의 신규 허가를 제한하고 이 지역에 있는 기존 농장을 이주시키면 인센티브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현재 실종 상태다. 전임자는 이에 대해 “예산 부족으로 내부적으로 포기하자는 결론을 내렸다”고 뒤늦게 실토했다.

가축 면역력을 높이고 저항력을 키우기 위한 사육환경 개선대책도 유명무실했다. 축사시설 현대화사업은 2009년부터 추진됐지만 2012년 이후 2015년까지 예산 집행률이 매년 줄어들고 있다. 그나마 대형 농가 위주로 진행돼 영세 농가는 오히려 지원을 받지 못했다.

지인배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축산실장은 “구제역 등 가축 질병이 종식되면 언제 터졌냐는 듯 관심이 갑자기 사그라든다”며 “백신 접종 여부를 지속적으로 검사하는 등 방역 대책을 현장에서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최혜령 기자 herstory@donga.com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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