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길호의 서울월드] 이태원에 레코드숍을 許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3일 14시 54분


코멘트
“또 젊은 사람이 왔네? 또 싸구려야?”

지난해 8월 고장난 턴테이블을 수리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의 한 오디오 수리점에 들어서는 순간 연세가 지긋하신 수리기사님께서 인사 대신 던진 말이었습니다. “수리비가 아까울 정도”로 저렴한 보급형 턴테이블을 고쳐 달라는 20~30대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고가의 골동품 턴테이블을 들고 찾아오던 중장년층이나 이따금 발길을 잇던 몇 년 전과는 달라진 풍경이라는 겁니다.

바야흐로 바이닐(LP)의 시대입니다. 지난달 미국 조사기관 닐슨의 발표에 따르면 2016년 미국에서 판매된 LP는 1310만 장입니다. ‘LP’가 부활하기 직전인 2007년 100만 장도 되지 않던 판매량이 13배 이상 뛰었습니다. 이웃나라 일본도 비슷합니다. 일본음반산업협회(RIAJ)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내에서 소비된 LP는 모두 79만9000장. 2009년 10만 장을 겨우 넘겼던 데 비하면 상당한 성장입니다.

한국은 통계 자체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10만 장 내외쯤 될 거라는 게 업계 얘깁니다. 물론 한국의 LP 시장도 성장세입니다. 음반 판매 사이트인 YES24에서 팔린 전체 음반 가운데 LP의 판매 비중은 0.4%(2012년)에서 3.8%(2016년)로 늘었습니다. 지난해 LP 판매량도 2012년 대비 7.2배 증가했습니다. 미국, 일본 등 사례에 비하면 ‘파이의 크기’는 여전히 작지만 한국 역시 세계 전역에서 불고 있는 LP 붐에 합류한 셈입니다.

● 일단 파이를 더 키우자는데…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지난해 12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그리워하는 중장년층과 음악을 흘려버리듯 소비하는 데 지친 10~20대의 관심이 LP의 부활을 주도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문화상품을 소장하고자 하는 욕구도 한몫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지난해 6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에 등장한 레코드숍 ‘바이닐&플라스틱’은 LP 붐의 방증이었습니다. 금융회사인 현대카드가 LP, CD 등 음반을 판매하기 시작한 겁니다. 지상 2층 규모 공간에 전세계에서 공수한 LP 9000여 장을 들여놨습니다. 음반 문화의 저변을 넓히고 음악가들을 지원하겠다는 취지였습니다. 하지만 영세 레코드상의 반발은 거셌습니다. “대기업이 문화 지원을 명분 삼아 골목상권을 침해했다”는 것입니다.

레코드상들이 한 달 넘게 바이닐&플라스틱 앞에서 항의시위를 이어간 끝에 현대카드와의 갈등은 봉합되는 듯 했습니다. 지난해 8월 현대카드는 영세 레코드상이 주로 다루는 중고 LP 판매 중단, 할인율 조정 등 상생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지난해 10월에는 영세 레코드상 모임인 전국음반소매상연합회와 손잡고 음반문화 축제인 ‘바이닐 페어’까지 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카드의 ‘이태원 상생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지난달 존 레전드 신보 LP를 현대카드가 선(先)발매하면서 연합회가 “신뢰가 깨졌다”며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카드는 “유통사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전체 유통 물량의 20%를 넘지 않겠다’는 상생 가이드라인도 지켰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연합회는 “현대카드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면서 정기적으로 열기로 검토 중이던 LP판매 행사마저 독자 개최하겠다는 입장입니다.

● LP 시장에 거품이 빠진다면

서울의 하위문화 용광로인 이태원에 등장한 거대 레코드숍의 속사정을 단순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개장 초기 우려와 달리 영세 레코드숍이 입은 타격은 미미하다고 합니다. 현대카드는 “LP 매체를 잘 몰랐던 고객들에게 발견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지 실제 매출을 올리려는 게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실제 바이닐&플라스틱 고객 중에는 이태원에 놀러 왔다가 우연히 발을 들인 사람이 많습니다.

회현, 홍대, 용산 등 서울 곳곳에 있는 레코드숍의 우려도 일리가 있습니다. LP 시장의 파이가 커져도 레코드숍의 성장으로 연결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미국 뉴욕의 ‘레벨 레벨(Rebel Rebel)’ 등 수십 년간 자리를 지켜온 해외 유명 레코드숍들이 속속 문을 닫고 있습니다. LP 붐에도 불구하고 레코드숍 문화 자체가 죽어가고 있어 임대료를 견디지 못한 탓이 큽니다. 2015년 전후 LP 시장의 폭발적이던 성장세가 더뎌지면서 “시장에 거품이 빠지기 시작하면 세월을 견뎌온 레코드숍도 함께 몰락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옵니다.

‘바이닐 투어리스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짝 고객’이 관광객들이 여행지를 휩쓸고 지나가듯 LP 시장을 떠나고 나면 레코드숍 등 산업 자체가 황폐화되리라는 비관적 전망을 나타낸 겁니다. 이태원에 등장한 매장 하나가 아날로그 열풍을 탄 바이닐 투어리스트가 될지 음반업계의 견인차가 될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차길호 기자 kil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