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깡통따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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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이용하는 식품전문 쇼핑몰에서 작은 토마토 홀을 주문했는데 착오가 생겼는지 무려 2.5kg짜리가 배송돼 왔다. 그 캔을 들고 조카들에게 토마토 스파게티를 만들어주러 갔다. 올리브 오일에 양파를 볶다가 토마토 홀을 넣으려고 할 때에야 그 캔이 원터치 방식이 아니라 캔 오프너로 가장자리를 돌려가면서 따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동생 집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깡통따개는 없었다. 그 상황이 저절로 구효서 작가의 한 단편소설을 떠올리게 했다.

기명(器皿)은 살림살이에 쓰는 온갖 그릇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소설을 쓰는 한 남자가 일상에서 도망치듯 한 암자로 떠난다.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는 길로 산책을 다니다가 남자는 요와 이불 한 채씩만 있는 삭막한 방에 꽃을 꽂아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꽃을 꽂아둘 기명 같은 게” 주위에 보이지 않는다. 길가에 널려 있는 음료수 깡통들을 주워 입구를 도려낸 후 꽃병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지만 암자나 이웃집, 마을의 잡화점에서도 깡통따개는 구할 수가 없다. 소설은 안 쓰고, 그때부터 남자가 깡통따개 찾기 순례를 시작하는 이야기.

1970, 8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었던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1년에 한 번씩 집에 돌아올 때 사오는 신기한 물건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 ‘맥가이버 칼’이라고 부르게 된 빅토리녹스 칼이 있었다. 크기도 작고 납작한데 드라이버, 핀셋, 자, 가위, 칼, 오프너, 깡통따개까지 척척 겹쳐 있는 게 놀라워 보였다. 잘 알려진 대로 오프너의 원리를 발견한 사람은 그리스 수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다. 고정된 받침점과 힘이 작용하는 힘점, 그리고 힘이 작용되는 작용점. 이른바 ‘지렛대의 원리’다. 이 원리로 이용되는 오프너나 깡통따개, 손톱깎이, 가위 같은 사물들은 서랍 밖으로 꺼내 놓기는 어렵지만 필요할 때마다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해 낸다. 믿음직스럽고 충직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다시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로 돌아가 보면, 주인공이 대구 시내까지 나가서 깡통따개를 구해 왔는데 이미 깡통들 입구가 깨끗이 잘려 있었다. 암자의 불목하니 사내가 호미의 날 끝을 깡통의 좁은 구멍에 넣은 뒤 가장자리를 솜씨 좋게 도려내 놓은 것이다. 남자는 그 깡통들에 구절초, 떡쑥, 개망초 같은 야생화들을 꽂아두고 잠을 청한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주룩 흐른다. 소설이란 무엇일까 다시 돌아보게 되는 장면이다. 이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첫 장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소설쓰기란 결국, 하찮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거나 진지한 것을 하찮게 생각하기 둘 중 하나다.”

기명의 비슷한 말로 기물(器物)이 있다. 사소해 보이지만 없으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기물, 깡통따개에 관해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조경란 소설가
#깡통따개#지렛대의 원리#구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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