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돈 보고 조카 양육? 편견 날릴 묘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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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고로 홀로 남은 9세 여아 고모, 국내 첫 ‘미성년후견지원신탁’ 추진


“나는 고모가 엄마였으면 좋겠어.”

조카 소연이(가명·9)가 한참 뜸을 들이더니 말문을 열었다. ‘엄마가 돼 달라’는 조카의 한마디가 김모 씨(48·여)의 가슴을 세차게 후려쳤다. 함께 살면서 딸처럼 대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그날 이후 고모와 조카 사이엔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것이 생겨났다.

소연이는 몇 해 전 발생한 교통사고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불시에 찾아온 사고는 소연이 부모는 물론이고 어린 오빠까지 집어삼켰다. 김 씨는 홀로 남아 바들바들 떨던 조카를 집으로 데려왔다. 엄마를 찾으며 울던 소연이가 사촌들과 어울리며 밝게 웃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 칼보다 날 선 주변 시선들

사고 이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소문 속의 김 씨 가족은 어린 조카에게 남겨진 사고 보험금 7억 원을 노린 ‘나쁜 가족’으로 분칠돼 있었다. 그의 지인은 “아이가 사고의 기억을 지우려는지 고모에게 많이 의존했다. 그런데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소연이의 삶을 지탱해줄 유산이 살아남은 가족들을 괴롭히는 비수로 돌변한 것이다.

김 씨는 주변의 시선을 피해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다. 소연이도 학교를 옮겼고 이름까지 바꿨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소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보험금 지급을 담당하는 직원조차 “이래서야 보험금 관리가 제대로 되겠느냐”며 의심했다. 김 씨를 정식 후견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친척마저 등장했다.

김 씨는 가족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현실의 악몽을 털어내기로 마음먹었다. 변호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KEB하나은행과 미성년후견지원신탁 계약을 맺고 사고 보험금을 은행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이달 김 씨 변호사와 하나은행이 관리 방법을 최종 협의해 가정법원에 서류를 제출할 예정이다. 법원이 이에 동의하는 처분명령을 내리면 하나은행이 소연이의 보험금을 관리한다. 은행이 매달 교육비가 포함된 생활비를 김 씨를 통해 소연이에게 지급하고 제대로 쓰는지 관리하는 것이다.

○ 사회적 안전망 역할 하는 ‘신탁업’

이번 계약은 국내에서 처음 맺는 미성년후견지원신탁 계약이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부모가 미성년자인 자녀를 두고 사망했을 때 금융사가 보험금, 유산 등을 맡아 성년이 될 때까지 관리해주는 신탁상품이다. 미성년 자녀가 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었을 때 가정법원이 후견인을 지정하는 과정에서 종종 금전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013년 7월 ‘최진실법’으로 불리는 ‘친권자동부활금지제’가 시행되면서 미성년후견지원신탁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이혼한 한쪽 부모가 사망하면 다른 한쪽에게 자동으로 친권이 생기는 제도가 폐지되고 가정법원의 심사를 거쳐 친권자를 선정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분쟁을 막기 위해선 전문 기관이 재산을 대신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지만 은행들이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해 계약 사례가 나오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미국이나 일본처럼 신탁업이 향후 하나의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학계, 가정법원 등과 협의해 꾸준히 관련 상품을 준비해왔다. 배정식 하나은행 신탁부 팀장은 “법원 인근에 신탁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고 전문가들을 배치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올해 1월엔 금융권 최초로 성년후견지원신탁 계약을 체결했다. 성년후견지원신탁은 치매 환자를 비롯해 정신지체자 등 피후견인의 재산 관리를 은행이 대신해 주는 것이다. 첫 계약 대상자는 지적능력이 1, 2세에 불과한 40대 남성 유족이었다. 하나은행은 노부부가 남긴 8억 원의 현금을 맡아 매달 생활비 170만 원을 후견인에게 지급하고 있다. 시스템이 갖춰진 만큼 가정법원도 후견인을 지정할 때 금전 다툼의 소지가 있으면 신탁업을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 미성년후견지원신탁의 이용 절차

▽ 미성년자 후견인

○ 은행과 협의해 계약
○ 관련 서류 가정법원에 제출

▽ 은행

○ 가정법원 처분명령에 따라 매달 일정 금액 입출금통장에 지급
○ 병원 치료비, 교육비 등 특정 사유 발생 시 해당 금액 지급
○ 성년 또는 계약서에 적힌 일정 연령이 되면 나머지 돈 지급
#조카양육#미성년후견지원신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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