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용의자, 베트남行 비행기 타려고 공항 나타났다 체포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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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피살] 독살범 정체는


말레이시아 경찰이 15일 김정남 살해에 가담한 여성 1명을 체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미궁에 빠질 뻔했던 이번 사건의 전모를 밝힐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사건 배경과 범행 주체가 누군지 등에 대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 범행 현장으로 돌아온 용의자

말레이시아 경찰에 따르면 이날 체포된 사람은 조안 티 흐엉이라는 이름의 베트남 국적 여성으로, 인구 16만 명이 사는 베트남 북부 소도시 남딘 출신으로 알려졌다. 그는 베트남 여권을 소지하고 베트남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15일 오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저비용항공사(LCC) 전용 제2터미널에 나타났다 8시 20분경 체포됐다.

셀랑고르 주 범죄조사국 부국장 파드질 아흐마트에 따르면 김정남은 이틀 전 바로 이곳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마카오행 여객기 탑승을 기다리던 중 피습됐다. 경찰에 따르면 공항 출국 대기장에서 기다리던 김정남에게 여성 두 명이 접근했고, 이 중 한 명이 김정남을 낚아채고 다른 한 명이 독극물을 얼굴에 뿌린 것으로 폐쇄회로(CC)TV 분석 결과 드러났다.

여성은 급히 자리를 떴고 김정남은 고통을 호소하며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다가가 “누군가 뒤에서 잡고 얼굴에 액체를 뿌렸다”며 도움을 호소했다. 김정남은 즉각 공항 내 치료소로 이송됐다. 아흐마트는 “김정남은 기절하기 직전이었으며 두통을 호소했다. 공항 내 치료소로 옮겨진 뒤에는 약한 발작 증세도 보였다”고 설명했다. 김정남은 공항 인근 푸트라자야 병원으로 이송되던 구급차 안에서 사망했다.

이후 이 여성은 공항에서 차로 15분 거리인 반다르 바루 살락 팅기 지역의 한 호텔에 이틀 동안 머물렀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이 여성이 김정남 살해를 실행한 인물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 공작원이라고 단정하기엔 어설픈 대목이 적지 않다.

북한 최정예 공작원 출신으로 여러 차례 남파 임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는 A 씨는 “북한이라면 김정남 살해를 이미 몇 달 전부터 설계했을 것이고, 테러에 가담한 여성들도 이미 한두 달 전에 현지에 침투해 예행연습을 거듭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북한 공작원이라면 이미 말레이시아를 빠져나갔을 것”이라며 “만약 여성 공작원들이 발각된다면 자결을 선택할 확률이 높아서 생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A 씨의 설명에 따르면 김정남 살해 같은 중요한 공작은 유인조, 암살조, 철수조 등으로 분리돼 움직이기 때문에 작전 수행과 철수 루트가 매우 정밀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체포된 여성은 다시 버젓이 범행 현장에 나타났고 순순히 체포됐다. 사전에 충분히 준비한 공작원으로 보기에는 무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건을 수사 중인 탄 스리 칼리드 아부 바카르 경찰 수사팀장은 “김정남 살해 후 현장의 CCTV에 ‘LOL’이란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던 여성이 맞다”고 확인했다. LOL은 ‘laughing out loud’의 약자로 ‘크게 웃는다’는 뜻이다. ‘너를 죽이며 비웃어주마’란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체포된 여성은 현재 인근 셀랑고르 경찰 수사본부에 구인돼 심문 중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회교 언론 ‘오레엔탈 데일리’는 “체포된 여성 용의자는 경찰에 자신이 베트남의 유명 인터넷 스타라고 주장했으며, 패러디 영상을 찍기 위해 말레이시아에 왔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 스프레이 뿌린 여성은 누구?

이 여성이 베트남인으로 신분을 숨긴 북한 공작원일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1987년 한국 KAL기를 폭파한 김현희 역시 한국에 송환된 뒤 일본인 행세를 했다. 김현희는 대외 정보 수집 및 테러에 가담한 노동당 35호실(당시 대외조사부) 소속이었다.

35호실은 세계를 대상으로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공작원 선발 시 지적 능력과 외국어 수준을 특히 중시한다. 공작원 가운데 절반 이상이 김일성종합대 외국어문학부나 외국어대 출신이며 적대국에서의 원활한 첩보활동을 위해 2, 3년간 어학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북한이 김정남 살해의 책임을 벗고 단순 살해로 만들기 위해 외국인을 매수하거나 외국 범죄 조직에 테러를 위탁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반인이 구하기 어려운 독극물로 김정남을 살해했다는 점에서다.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은 15일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간담회에서 북한 당국이 약 5년 동안 지속적으로 김정남 암살 기회를 엿보며 준비했다고 말했다. 북한이 외국 용병을 고용했을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던 셈이다.

또 실제로 스프레이를 뿌린 사람은 이 여성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조안 티 흐엉은 손수건으로 김정남의 얼굴을 가리는 역할만 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또 다른 여성 용의자 한명의 신병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스프레이를 뿌린 여성이 북한 국적이라는 보도도 있지만 최종 확인되지는 않았다. 아직 범행 당시 장면이 담긴 CCTV 화면은 공개되지 않았다.

진실을 규명할 남은 중요한 열쇠는 김정남 부검 결과와 나머지 용의자 4명의 체포 여부다. 부검 결과 살해에 사용한 독극물이 일반인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물질일 경우 테러 전문 조직이 개입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현지 경찰은 여러 국적을 가진 인물들이 이번 사건에 개입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나머지 용의자들이 15일 체포된 베트남 여성처럼 차례로 경찰에 체포된다면 이들의 자백에 따라 사건 배후의 윤곽이 보다 뚜렷하게 밝혀질 가능성이 있다.

주성하 zsh75@donga.com·황인찬 기자
#김정남#피살#독살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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