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하면 그만인 서울미래유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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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사라지는 유-무형 유산 보존”… 일제 폐가-쪽방촌까지 선정 논란
별다른 혜택이나 지원 없어… 해당 업소들 “영업 더 부담” 철회도


서울 종로구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에서 혜화역 방향으로 3분 정도 걷다가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지붕은 천막으로 덮어놓은 낡은 주택을 볼 수 있다. 1층에 샌드위치 가게 간판이 붙어 있지만 언제 장사를 했는지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색이 바랬다. 오래전 붙여놓은 듯한 ‘쓰레기 투척, 소변 금지’라고 적힌 종이가 한때 사람이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 봤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그런데 서울시는 2013년 이 건물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준공된 것으로 추측되는 주거시설로 오랜 세월을 견디며 독특한 경관을 연출해 보존 가치가 높다”는 게 선정 배경이지만 동네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인근 주민 백모 씨(56)는 12일 “사람이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고, 근처 상인들이 자재 창고로 쓴다”며 “폐가(廢家) 같아서 밤이 되면 으스스한 느낌마저 든다”고 말했다.

서울미래유산은 서울시가 “개발 논리에 의해 사라지는 유·무형의 유산을 지켜나가겠다”는 취지로 2013년 도입한 정책이다. 그해 처음으로 281개를 지정한 뒤 매년 50개 안팎을 지정해 현재 400개가 넘어섰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보존 가치를 무엇으로 판단하느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주민 500여 명이 사는 영등포구 ‘쪽방촌’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서울시는 “집창촌이 쪽방촌으로 변모한 것으로 산업화의 그늘과 사각지대에 내몰린 이들의 삶을 보여준다”며 2014년 지정했다. 열악한 거주환경 때문에 지원과 개선 대상으로 여겨지는 쪽방촌이 보존 대상이 된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던 쪽방촌의 한 주민은 “갈 곳이 없어 이 동네로 내몰린 우리가 구경거리라도 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서울 종로구 동대문역 인근에 위치한 이 낡은 주택은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서울 종로구 동대문역 인근에 위치한 이 낡은 주택은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동대문신발종합상가같이 이전이 추진되는 시설물이나 균열이 발생할 정도로 낡은 상가도 미래유산으로 적절한지 의구심이 든다는 지적도 있다. 서초구 관계자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은 주거지역 발전과 경부선 지하화 계획에 따라 이전을 검토하던 중에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며 “터미널 자체가 미래유산일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낡은 건물은 보존해야 한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미래유산으로 지정된다고 해서 별다른 혜택이나 지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1세대 헌책방’으로 불리며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서대문구 ‘공씨책방’은 지난해 10월 새 건물주가 요구한 임대료를 맞추지 못해 퇴거 위기에 몰려 있다. 장화민 대표는 “서울시에서 가게를 옮기게 되면 미래유산 명패를 옮겨 달아준다고는 하더라”고 말했다. 공씨책방 같은 자영업체(120여 개)는 건물 다음으로 많이 지정됐다.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자영업체 10곳을 조사한 결과 모두 “장사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존에 대한 부담 때문에 매각도 쉽지 않다”고 답했다.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가 철회한 15곳 중 대부분이 자영업체다.

서울시 관계자는 “미래유산은 문화재와는 달리 지원도, 규제도 없이 보존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차원일 뿐”이라며 “장소나 건물에 대한 사유재산권 행사에는 제약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을 거라면 왜 선정하느냐는 비판이 제기되자 동요작가 윤극영 선생의 서울 강북구 가옥 등 일부 미래유산은 시에서 매입하거나 임차하기도 했다. 민간단체에서 매입하면 일부 비용을 지원하는 공모사업도 벌였지만 한 건도 성사되지 않았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서울미래유산#기준#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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