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쳐온 졸업 ‘전탈’ 불효자는 웁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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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게 일자리를!

채용공고보다 취업강좌 광고가 더 많은 취업 게시판 10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경력개발센터 앞에 설치된 취업게시판. 포스터 9개 가운데 채용 공고는 2개뿐이었고 나머지는 교육과정 홍보, 문화공연 홍보, 인턴 채용을 위한 것이었다. 차길호 기자 kilo@donga.com
채용공고보다 취업강좌 광고가 더 많은 취업 게시판 10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경력개발센터 앞에 설치된 취업게시판. 포스터 9개 가운데 채용 공고는 2개뿐이었고 나머지는 교육과정 홍보, 문화공연 홍보, 인턴 채용을 위한 것이었다. 차길호 기자 kil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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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노트북 바탕화면에 ‘2017’이라는 이름의 새 폴더를 만들었다. 숫자 네 개를 차례로 누르는데 왈칵 눈물이 났다. ‘앞으로 이 폴더에 얼마나 많은 입사지원서를 저장해야 합격할 수 있을까.’ 눈앞이 캄캄했다. 취업 준비생 김모 씨(25·여·건국대)의 새해 첫날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 씨는 지난해 하반기 채용 시장에서 ‘전탈’했다. 지원한 모든 기업에서 탈락했다는 뜻이다. 김 씨의 폴더 ‘2016’에는 자기소개서(자소서) 파일 30여 개가 저장돼 있다. 자소서 옆에는 꼭 가고 싶었던 대기업부터 눈높이를 대폭 낮춘 중소기업까지 다양한 회사명이 붙어 있었다. 마른 수건 쥐어짜듯 대학 시절 경험을 모아 자소서를 채웠지만 그때마다 “나는 무능력하다”란 자괴감에 시달렸다.

요즘 김 씨는 매일 오전 10시 도서관에 나와 12시간 동안 취업 준비에 매달린다. 학교 취업지원센터도 꼬박꼬박 들른다. 하반기 채용은 이미 끝났지만 혹시나 새 공고가 떴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그는 “전탈 충격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탄핵 정국에 대기업이 상반기 채용을 대폭 줄인다’는 우울한 이야기에 맥이 빠진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청년층(15∼29세) 실업률은 9.8%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10∼13일 동아일보 취재진은 졸업식을 앞둔 서울 시내 주요 대학 10곳의 취업지원기관을 찾았다. 가는 곳마다 취업 실패에 따른 좌절감과 앞으로 더 힘들 것이라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게시판은 채용 공고보다 취업 교육 광고나 단기 알바 모집 공고, 공연 포스터가 더 많았다. 그나마 채용 공고에는 신입보다 경력을 구하는 내용이 더 많았다.

○ 전탈 불효자는 웁니다

13일 졸업식을 막 끝낸 서울의 한 대학 졸업생이 학사모를 벗어 손에 들고 캠퍼스의 텅 빈 광장을 걸어가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3일 졸업식을 막 끝낸 서울의 한 대학 졸업생이 학사모를 벗어 손에 들고 캠퍼스의 텅 빈 광장을 걸어가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대학 입학식 날 학교 정문을 들어설 땐 이렇게 될지 정말 몰랐어요.”

서울대생 장모 씨(24·여)는 지난해 하반기 채용 시장에서 단 한 곳에도 합격하지 못했다. 부모에게 “죄송하다”라는 말을 전하고 졸업을 유예했다. 장 씨는 ‘전탈 불효자’라는 자책에 우울증까지 겪고 있다. 장 씨는 “취업 준비를 다시 시작했지만 원하는 기업의 채용 공고가 뜨지 않을까 걱정이 크다”라며 “눈높이를 어디까지 낮춰야 할지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전탈 불효자는 방학 때 고향에 갈 수도, 제대로 쉴 수도 없다. 이모 씨(24·한양대)는 커리어개발센터에서 커리어 멘토링 수업을 듣고 있다. 그는 지난해 하반기 30여 곳에 지원했지만 모두 탈락했다. 1차 면접에 오른 것도 딱 한 번이다. 이 씨는 인터뷰 시간도 아깝다며 “수능 준비하듯 자소서 쓰기와 필기시험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 취업 한파가 두려운 ‘취유생’

대학가에서 ‘실패도 경험이다’라는 말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 ‘계속 도전하면 계속 떨어질 것’이란 전탈의 두려움이 가득하다. 결국 선택 중 하나는 무작정 취업 준비를 미루는 것이다. 이른바 ‘취유생(취업유예생)’이다. 재수생, 삼수생 낙인이 찍히지 않겠다는 절박한 심경이 담겨 있다. 중앙대 손모 씨(27)는 “어차피 떨어질 텐데 더 큰 상처를 받기 싫어 상반기 도전을 포기했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취유생은 뒤늦게 스펙 보완에 나선다. 고려대생 정모 씨(26)도 지난해 20회 넘게 도전했지만 결국 취업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아예 올해는 취업 대신 부족한 인턴 경험을 쌓기로 했다. 정 씨는 “지금 상태로는 다른 구직자들과 출발선에 같이 서기도 어려울 것 같다”라며 “이러다 단기 알바만 전전할까 걱정이 크다”라고 했다.

○ 새내기 대신 ‘취준내기’

숙명여대 2학년 이모 씨(21)는 지난해 입학하자마자 취업경력개발원 문을 두드렸다. 아나운서를 꿈꾸는 이 씨는 1학년 때부터 진로·취업 상담과 적성검사를 받았다.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취업 정보도 알뜰히 챙겼다. 특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 관리에 신경 쓰고 있다. 이 씨는 “SNS 활동도 자소서에 넣기 때문에 특별히 관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제 대입 문턱을 넘으면 그냥 새내기가 아니라 ‘취준내기(취업준비생 새내기)’가 되는 게 자연스러운 분위기다.

주변에 취업한 선배나 동기를 찾기 어렵다보니 취업 정보 얻기도 힘들어졌다. 결국 학생들은 주로 교내 취업지원기관을 찾는다. 하지만 지금 같은 취업난 속에선 취업 지원 기관도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성균관대 관계자는 “삼성이 계열사별로 소규모 채용을 진행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뒤 학생들이 더욱 불안해하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서강대 관계자는 “채용 규모가 줄어들수록 기업들은 직무 능력을 더욱 중요시할 것”이라며 “대기업 인턴이 어려우면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 인턴이라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차길호 kilo@donga.com·김단비·이호재 기자
#졸업#청년실업#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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