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승헌]워싱턴에서 보는 문재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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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최근 미국 워싱턴을 취재하면서 가장 놀란 일은 반(反)이민 행정명령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암살 가능성을 거론한 의회 청문회도 아니었다. 하원 북핵 청문회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대북관이 거론된 일이었다(본보 9일자 A5면 참조).

워싱턴이 문 전 대표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예뻐서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초기 아시아 정책의 틀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 핵심국 중 한국만 정상이 정치적 유고(有故) 상태다. 트럼프 행정부는 주한 미국대사를 공석으로 남겨둘 정도로 차기 정권과 주요 한미 이슈를 논의하겠다고 방침을 정했으니, 대선 주자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는 그의 생각이 궁금한 것이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요즘 만나는 미국 공무원 상당수가 ‘문재인이 누구냐’라고 묻는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문 전 대표는 안보 이슈와 관련해선 워싱턴에서 ‘노무현 2.0’ 정도로 알려져 있는 게 현실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에 대해 “배치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했다가 최근엔 “무조건 사드 배치를 취소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효용성이 검증돼야 한다”고 해 말 바꾸기 논란도 있었다. 워싱턴 외교가는 10년도 더 된 노무현 정권의 ‘반미면 어떠냐’ 구호에 여전히 불편한 기억을 갖고 있다.

문 전 대표도 이런 우려를 아는 듯하다. 부인과 관련된 논란으로 캠프에서 하차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을 영입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전인범은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문재인의 안보관을 ‘연대보증할 만한’ 카드였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미국의 ‘인정’을 받을 필요는 없지만, 자신이 집권해도 한미 동맹엔 아무런 변함이 없다는 뜻을 알리는 것은 표의 확장성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당선 여부와 무관하게, 대선이 조금이라도 더 생산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라도 문 전 대표가 2017년에 걸맞은 외교 구상을 갖추길 바란다. 요즘 안희정 충남도지사에게 맹추격당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가장 유력한 주자인 그가 취할 안보 공약 스탠스는 대선 판 전체에 미칠 영향이 크다. 만일 진보 지지층을 의식해 또다시 철 지난 반미론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간 올해 대선 역시 무한정쟁의 색깔론으로 지샐 것이다. 정작 중요한 일자리 창출, 미래 먹거리, 교육개혁 등 핵심 어젠다에 대한 검증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문 전 대표는 멀리 볼 것도 없이 지난 주말 워싱턴에서 벌어진 일만 잘 살펴봤으면 한다. 우리만 탄핵 정국이란 ‘섬’에 빠져 있을 뿐 지금 주변국들은 국익을 위해 트럼프와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던 트럼프와 밀고 당기기 끝에 9일 전화를 하고 ‘하나의 중국’ 원칙 존중이라는 답을 얻어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조공외교’라는 비아냥거림을 무릅쓰고 10일 아시아 정상 중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를 세 차례나 ‘도널드’라고 불렀다. 트럼프는 그를 플로리다 리조트로 초대해 골프까지 치며 환대했다.

좋든 싫든 미국은 당분간 상수(常數)다. 이민 규제 행정명령 한 건으로 지구촌이 들썩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마침 문 전 대표가 15일 외교 참모인 김기정 연세대 행정대학원장을 워싱턴 세미나장에 보내 한미 동맹 구상을 밝힌다고 한다. 김정은이 트럼프 취임 후 첫 미사일 발사 시험까지 했으니 워싱턴의 더 많은 눈이 쏠릴 것이다. 그가 소모적 안보 논쟁을 넘어 새로운 담론을 끌어낼지, 촛불 세력을 의식해 ‘노무현 아바타’로 남을지 지켜볼 일이다.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
#문재인#노무현 2.0#김기정#노무현 아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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