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같은 소들 묻고 큰절… 텅 빈 축사보니 어찌할지 막막”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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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치닫는 구제역]구제역 발생지역 축산농가 가보니

썰렁한 가축시장 구제역 위기경보가 최고 단계인 ‘심각’으로 격상돼 전국 86개 가축시장이 잠정 폐쇄된 
가운데 10일 전남 담양군 담양축산농협 가축시장에서 방역당국 담당자가 텅 빈 경매장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담양=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썰렁한 가축시장 구제역 위기경보가 최고 단계인 ‘심각’으로 격상돼 전국 86개 가축시장이 잠정 폐쇄된 가운데 10일 전남 담양군 담양축산농협 가축시장에서 방역당국 담당자가 텅 빈 경매장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담양=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지난해 충북젖소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소를 모두 파묻고 그 앞에서 절을 했어요. 잘 가라고, 못난 주인이어서 미안하다고….”

대학에서 축산학을 전공하고 석사 학위까지 받은 A 씨(40). 대를 이어 충북 보은에서 10년째 젖소를 기르고 있다. 온갖 애정을 쏟고 구제역 예방을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물거품이 됐다. 그는 “가슴이 먹먹할 뿐”이라며 “내년 이맘때가 오면 도살처분된 젖소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고 싶다”고 말하며 눈가를 훔쳤다.

구제역이 ‘심각’ 단계에 이르며 전국으로 확산될까 봐 조마조마한 지경이다. 애지중지 키워 온 소를 땅에 묻은 농장주들은 실의에 빠졌다. 지역 경제도 시름에 잠겼다.

○ “자식 같은 내 새끼들”

10일 오후 청주∼상주 고속도로 속리산 나들목을 나와 승용차로 10여 분 달려 충북 보은군 마로면에 도착했다. 전날 내린 눈과 매서운 바람 때문인지 인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외부의 접근이 원천 차단된 가운데 소독을 하는 면사무소 직원만 띄엄띄엄 눈에 띄었다.

마로면과 함께 구제역 확진 판정을 받은 인근 탄부면도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렵게 만난 한 축산 농민은 “송아지가 태어나면 인공호흡도 해 주고 직접 핥아 주기도 한다”며 “소들은 진짜 ‘내 자식’처럼 키운 아이들”이라고 착잡해했다.

탄부면 구암리 김상배 이장은 “구제역이 발생한 한우 농장주가 그 전날 아침 전화로 ‘소가 이상하니 주변 축주(畜主)들에게 알려 달라’고 해 모두에게 소식을 전했는데 안타깝게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혀를 찼다. 이 농장주는 밤에 다시 문자메시지를 보내 ‘미안하다. 관리 소홀로 이런 일이 생겼다. 다른 축주들도 구제역에 신경 써 달라’고 했다고 한다.

앞서 6일 구제역이 확진된 전북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에서는 여섯 농가에서 키운 한우 339마리를 매몰 처리했다. 10일 만난 마을 주민 강모 씨(60)는 “보상을 해 준다고는 하지만 몇 년간 사육을 못 하게 되니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며 텅 빈 축사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O형 구제역이 발견된 정읍시나 보은군과는 달리 A형 구제역 확진 판정이 처음 나온 경기 연천군의 분위기도 침울했다. 아직 확진 판정이 내려지지 않은 농장에서는 분주하게 긴급 소독 작업을 하고 있었다. 흰 방역복을 입은 수의사는 60cm 정도의 막대 끝에 백신 주사기를 달고 능숙한 솜씨로 소의 목덜미를 찔렀다. 소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다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수의사는 재빨리 막대를 거두고 다른 소에게 주사를 놓았다. 군에서 나온 수의사들은 30여 분 만에 방역 작업을 마치고 이웃 농가로 떠났다. 연천군은 9일 군에서 처음 확진 판정이 나온 군남면의 젖소 농가로부터 반경 10km 이내 지역에서 가축의 이동을 금지하고 소독 작업을 실시했다.

○ 한우 관련 산업도 타격

농장주들은 정부 정책이 사후약방문 격이라며 불만을 쏟아냈다. 보은군의 A 씨는 “평소에는 항체형성률을 점검조차 하지 않더니 일이 터지니까 축산농들이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몰아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0마리 가까운 젖소에게 일일이 예방접종을 한 그는 “50마리 이하를 키우는 농가는 제도적으로 수의사 지원을 받기 어려워 모든 것을 사비로 해야 한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연천군에서 소 20마리를 키우는 김재욱 씨(76)는 “구제역이 처음도 아닌데 이렇게 사태가 커지는 걸 보면 이제는 화가 나거나 지겨운 것을 넘어 해탈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사육 농가뿐만 아니라 관련 산업도 타격을 맞았다. 2000여 농가가 한우 7만7700여 마리를 키우는 대표적 축산 밀집 지역인 정읍시는 전체 인구의 10%가량이 한우 관련 산업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정읍시 산외면 한우마을 주민에 따르면 구제역 발생 이후 손님의 발길과 택배 주문이 20∼30% 줄었다. 주변 농장에서 한우를 직거래하는 산외 한우마을 정육점과 정육식당 20여 곳도 매출이 크게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지역 축제도 대부분 취소됐다. 11일 열릴 예정이던 산외면 원정마을과 칠보면 백암마을의 ‘당산제’, 15일로 예정된 동학농민운동 ‘고부 봉기 재현 행사’는 취소됐다. 전북 고창군과 부안군에서 열릴 예정이던 정월 대보름 행사도 무산됐다.

보은=장기우 straw825@donga.com / 정읍=김광오 / 연천=황성호 기자
#구제역#한우#가축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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