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주자 ‘성적표’ 여론조사의 함정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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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여론조사의 허와 실
대선주자 운명 쥔 성적표


“그야말로 문전성시(門前成市)다.”

대선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와 최근 급상승세를 타고 있는 안희정 충남도지사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문 전 대표의 싱크탱크인 ‘정책공간 국민성장’에는 학자 900여 명이 이름을 올렸고 지지 그룹인 ‘더불어포럼’에는 직업군별 인사 1000여 명이 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안 지사의 캠프에는 매일 자원봉사 희망자, 지지자, 전문가 등 약 100명이 몰려 발 디딜 틈이 없는 분위기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여론조사가 곧 사람과 돈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반면 낮은 지지율이 대선 행보의 발목을 잡는 현상이 재연됐다. 설 연휴 전까지 대선 출마를 강하게 시사했던 박원순 서울시장과 김부겸 민주당 의원은 최근 출마를 접었다. 박 시장은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당시 여론조사에서 야권 1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이후 하락세를 반전시키는 데 실패했다. 불출마 기자회견에서 그는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라고 고백했다. 박 시장과 가까운 한 기초단체장은 “신뢰도가 떨어지는 여론조사 결과만 보고 대선 도전 자체를 접은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며 “여의도 정치권이 여론조사에 종속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조기 대선을 눈앞에 둔 2017년 대한민국 정치권에선 여론조사의 위력이 다시 한번 위세를 떨치고 있다. 명지대 윤종빈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제대로 된 검증 없이 여론조사 지지율만으로 정치 행보를 결정하는 건 적절치 않다”며 “이대로라면 정치인들이 콘텐츠나 알맹이 있는 정책보다는 이미지나 포퓰리즘 공약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 정치생명 걸린 지지율… 포퓰리즘 공약 남발 우려



여론조사가 대선후보 캠프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좌우하는 현상이 이번 대선에서 재연되고 있다.

문 전 대표 주변에는 지지자와 전문가들이 몰려들어 내부 경쟁과 분화가 본격화하고 있다. 정책공약을 만드는 ‘정책공간 국민성장’ 관계자는 “문 전 대표에게 자신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관철하기 위해 직보(직접 보고) 라인을 찾거나, 이름만 올리고 활동은 안 하는 사람들과 구분되는 핵심 그룹을 따로 구성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귀띔했다.

곧 발족하는 공식 캠프에는 친문(친문재인) 의원들뿐 아니라 비문(비문재인) 성향의 의원들까지 속속 합류하고 있다. 한 비문 성향의 의원은 “지금 문 캠프에 ‘어중이떠중이’로 합류하기엔 늦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라고 전했다.

여론조사에 일희일비하는 대선 캠프들

10일 갤럽 조사에서 지지율 1위인 문 전 대표와 지지율 19%로 2강 구도를 형성한 안 지사의 캠프는 요즘 북새통이다. 당초 안 지사는 “대규모 캠프를 꾸리거나 사람 줄 세우기를 하지 않겠다”며 30, 40대 젊은 인재들로 약 40명 규모의 캠프를 구성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설 연휴를 지나고 지지율이 급상승하면서 자원봉사와 후원 문의가 폭주해 오히려 고민이 늘었다. 모든 사람에게 자리와 역할을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안 지사 측 관계자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안희정 크루(crew)’ 제도를 만들어 지지자들을 참여시키고 있다”라며 “지지율이 급등하면서 문 전 대표 측에 이름을 올렸던 교수들의 참여 문의가 오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반면 지지율 반등에 실패한 대선주자들은 조기 대선이 가시화되면서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2년 넘게 전남 강진에 머무르다 지난해 10월 정계에 복귀한 국민주권개혁회의 손학규 의장에게는 낮은 지지율이 치명타였다.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서로 손 의장의 지원을 약속받기 위해 강진을 찾을 때만 해도 그의 몸값은 ‘상한가’를 쳤다. 하지만 정계 복귀와 민주당 탈당을 거치면서 지지율이 1∼4%에 머무르자 민주당 손학규계 의원 10여 명은 손 의장에게 등을 돌렸다. 손 의장 측 한 의원은 “손 의장의 지지율이 10%만 나왔더라도 비문 진영이 모두 가세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상임공동대표를 포함한 나머지 주자들은 저조한 지지율로 인재 영입에 고전하고 있다. 안 전 대표는 2012년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 위주로 캠프를 꾸렸지만 새롭게 참여한 교수 등 인사는 많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해 말 탄핵 국면에서 문 전 대표의 턱밑까지 추격했던 이재명 경기 성남시장은 최근 지지율이 하락하자 유명 인사보다 일반 후원그룹을 강조하는 전략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농민, 노동자, 상인, 청년활동가 등으로 구성된 ‘흙수저 후원회’를 구성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가까웠던 인사들에게 ‘도와 달라’고 찾아가 보면 문 전 대표를 돕기로 했다는 사람이 많아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귀국 20일 만에 여론조사 지지율 하락을 막지 못하고 중도 하차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주변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새누리당의 한 보좌관은 “반 전 총장 귀국 전 상당수 여권 보좌관이 사표를 내고 합류를 타진했는데, 지금은 사표 낸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저조한 지지율이 돈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선 경선에 출마할 경우 기탁금(민주당 약 3억5000만 원), 홍보비, 인건비, 지방 순회경선 부대비용까지 10억 원 이상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야권 관계자는 “지지율이 한 자릿수인 후보들은 돈 문제로 경선 참여를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여론조사는 주요 정치인의 정치적 입장을 결정하는 바로미터다. 문 전 대표는 ‘대선 전 개헌’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여론조사 결과를 많이 고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친문 성향의 한 의원은 “탄핵 국면에서 국민의 주요 관심사는 적폐 청산 같은 사회 개혁 이슈였다. 개헌은 3, 4번째 관심사였기에 국민만 믿고 ‘대선 후 개헌론’을 고수했다”고 설명했다.

신뢰도는 계속 떨어지는데 영향력은 더 커져


그런데 최근 여론조사가 실제 선거 결과를 크게 빗나가는 사건들이 세계적으로 연이어 발생해 지구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4·13총선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은 새누리당의 절반 의석 확보 이상의 승리를 점쳤지만 결과는 달랐다. 지상파 방송 3사가 66억여 원을 들여 공동 출구조사를 실시해 여소야대는 예측했지만 제1당은 맞히지 못해 ‘반쪽짜리 성공’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는 대선 전날까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주류 매체들이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를 예상했다가 결국 망신을 당했다. 보수 성향의 폭스뉴스는 “진보 주류 매체들이 여론조사 숫자에 나타나지 않은 ‘기성 제도권에 대한 미 국민의 실망과 분노’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영국에서는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 당일 유럽연합 잔류가 우세하다는 결과를 발표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정치권에서 여론조사의 힘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대선 때부터였다.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는 두 곳의 여론조사기관에 각각 전국 유권자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의뢰했지만 한 기관의 결과가 기준에 미달해 무효화됐다. 결국 2000명의 여론조사 결과만 가지고 후보 단일화가 성사됐고, 노 후보가 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7년 8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은 가장 치열한 당내 경선으로 평가받는데, 당시 박근혜 후보는 다른 항목에서 이기고도 여론조사에서 져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했다. 박 후보는 대의원, 당원, 일반국민 투표(80%)에서 이겼지만 20%가 반영된 여론조사에서 패해 후보 자리를 내줬다. 이 후보는 경선 승리 후 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2014년 6·4지방선거와 2016년 4·13총선에서는 100% 여론조사로 후보를 결정한 지역구가 적지 않았다.

중앙대 국제정치학과 최영진 교수는 “여론조사에 매달린 정치는 정당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유근형 noel@donga.com·박성진 기자
#대선#여론조사#지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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