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형-기호-문자 더미 속에 숨은 생각의 편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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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비디오아트 선구 故박현기 작가의 오일스틱 드로잉전

박현기(1942∼2000)는 한국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 꼽힌다.

해외에서 활동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과 달리 박현기는 국내를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나무와 돌, 대리석 등과 모니터를 함께 설치하고 영상들을 중첩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잘 알려졌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박현기―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전은 작가의 비디오아트 작품보다는 오일스틱 드로잉을 집중적으로 선보이는 전시다. 오일스틱은 물감을 크레파스처럼 굳힌 것을 가리킨다. 유족이 소장한 50여 점 중 20여 점이 추려져 관객들과 만난다. 그의 오일스틱 드로잉이 이렇게 대규모로 전시되기는 처음이다. 고인이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가 전과해 건축과로 졸업한 만큼, 설치 작업을 하면서도 회화에 대한 열망이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무제’, 1993∼1994년. 한지에 오일스틱으로 그린 그림이다. 박현기 작가의 설치 모티브인 돌과 TV 모니터가 보인다. 작가의 주제의식인 ‘이미지의 중첩’에 대한 회화적 시도를 엿볼 수 있다. 갤러리현대 제공
‘무제’, 1993∼1994년. 한지에 오일스틱으로 그린 그림이다. 박현기 작가의 설치 모티브인 돌과 TV 모니터가 보인다. 작가의 주제의식인 ‘이미지의 중첩’에 대한 회화적 시도를 엿볼 수 있다. 갤러리현대 제공
비디오아트로 유명한 작가이지만 오일스틱 드로잉에서 그 모티브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작가는 1993∼1994년 집중적으로 오일스틱 드로잉 작품을 만들어냈다. 빨강, 노랑, 회색이 집중적으로 사용됐으며 기호, 문자로 가득 찬 그림에 돌과 모니터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모두 박현기가 설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다룬 소재들이다. 그의 작품 모니터에서 볼 수 있는 단어와 형상들을 드로잉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미지의 중첩’이라는,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했던 주제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미술평론가 신용덕 씨는 박현기의 드로잉에 대해 “특정한 대상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생각의 편린, 생각하는 과정의 들쑥날쑥함을 표현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무제’, 1982년. 돌과 TV 모니터로 이뤄진 설치작품. 갤러리현대 제공
‘무제’, 1982년. 돌과 TV 모니터로 이뤄진 설치작품. 갤러리현대 제공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전시의 표제는 함께 선보이는 전시작품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만다라 시리즈: 카오스 #2’(1997년)는 포르노 영상과 불상 이미지를 계속 바꾸어 겹쳐놓은 영상이다. 1초 간격으로 바뀌는 두 종류의 영상을 통해 거대한 간극이 있어 보이는 종교와 포르노를 같은 위치에 놓아버리는 풍자로 읽힌다. 편마암을 잘라 붙인 계단 모양 돌과 실제 계단을 나란히 세운 ‘무제’(1987년)에서는 인공의 선과 자연의 선이 뚜렷하게 대조된다. 작품은 무엇이 진짜 계단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함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그 위에 TV 모니터를 놓은 ‘무제’(1982년)는 오일스틱 드로잉이 입체화한 모양새여서 친근감을 준다. 전시는 3월 12일까지.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박현기전#비디오아트#오일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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