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시련의 계절’… 550조 운용도 삐걱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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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금운용본부 직원들 줄사표

“당분간 방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정이 빠듯해 최고경영자(CEO)가 전북 전주까지 내려갈 순 없을 것 같습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최근 한 해외 사모펀드 측으로부터 “올해 방문 일정을 잡기 어렵다”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만 들렀다 가는 짧은 일정만 소화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세계 3대 연기금인 국민연금의 투자를 받으려고 앞다퉈 방문 일정을 문의하던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는 “전주 이전과 인력 이탈,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사실이 알려져 세계 투자업계에서 홀대를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올해 해외 사모펀드 경영진 등 주요 해외 투자처와 회의 일정을 아직 한 건도 확정하지 못했다.

5000만 국민의 노후자금을 관리하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흔들리고 있다. 25∼28일 전주 이전을 앞두고 기금 운용 인력이 연쇄 이탈하고 있다. 정치적 혼란에 따른 국정 공백기의 기강 해이와 사기 저하도 심각하다. 금융투자업계는 “기금운용본부가 본업인 투자조차 손을 놓고 있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 최근 1년간 약 50명 떠나… 기강, 사기 최악

9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따르면 현재 재직 중인 운용역은 정원(260명)의 약 85%인 223명이다. 최근 1년간 약 50명의 운용역이 떠났지만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주 이전이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추가 인력 이탈도 예고되고 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현재 20명 정도의 운용역이 퇴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직원들 대부분이 사직을 고려할 만큼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삶의 기반을 서울에 둔 직원들이 금융권에 비해 낮은 급여를 감수하면서 거주 환경이 떨어지는 지방에서 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최근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한 것을 두고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를 받으면서 직원들의 사기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금운용본부 직원 A 씨는 “국민의 노후에 이바지한다는 자부심으로 근무했지만 검찰 수사 이후에는 ‘삼성의 부역자’란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직원들의 근무 기강도 흔들리고 있다. 국민연금공단 감사실은 A 실장 등 퇴직 예정자 3명이 공단 웹메일을 이용해 투자 계획 및 분석 자료 등을 개인용 노트북 등에 저장한 사실을 적발했다. 국민연금공단은 이들이 내려받은 자료가 재취업할 금융회사에 전달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 550조 원 국민 노후자금 운용 경고등

약 550조 원의 국민 노후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흔들리면서 당장 계획된 투자를 집행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투자를 유치해야 하는 국내 증권사, 자산운용사, 사모펀드(PEF) 등은 올해 3월 이후 국민연금과의 회의 일정을 전혀 잡지 못하고 있다. IB 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 운용역들이 ‘담당자가 바뀔 수 있어 내부 의사결정이 안 된다’며 접촉을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여부를 결정할 의결권전문위원도 9명 중 5명이 공석인 채로 방치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위기는 국가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글로벌 연기금들은 투자 인력이 10년, 20년 머물 수 있는 근무 환경을 조성해 장기 투자의 안정성을 도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상급 기관인 보건복지부나 국민연금공단은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할 문형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61)은 지난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찬성 의결을 지시한 혐의로 구속된 상태다. 국민연금공단은 “내부 단속에 힘쓰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을 뿐이다. 남 연구위원은 “전문성과 독립성을 높일 수 있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조직 개편 방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건혁 gun@donga.com·김윤종 기자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줄사표#55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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