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우리가 몰랐던 한식]전호나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황광해 음식평론가
황광해 음식평론가
이달 초, 지인에게 연락을 받았다. “이제 나오기 시작합니다. 바다 날씨가 좋으면 10일 경이면 서울에서도 받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뜸 전호나물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연락했다. 나물 먹는 모임이다. 민어, 전어 먹는 모임은 있는데 나물 먹는 모임이 없을 이유는 없다. 전호나물은 묘한 녀석이다. 10월경에 싹을 틔우고 입을 내뻗는다. 다른 식물들이 모두 잎을 거둘 시기다. 차가운 겨울, 잎을 달고 지낸다. 계절을 거꾸로 산다. ‘눈 속에서 자라고, 눈 속에서 채취하는 나물’이라 귀하게 여긴다. 향이 아주 좋다. 아직은 울릉도 자생이 흔한 편이다.

좋았던 나물, 귀하게 여겼던 나물 반찬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1670년경 편찬된 ‘음식디미방’에 흔하게 나타났던 동아는 거의 사라졌다. 피마자 이파리도 귀하다. 가정에서 피마자 나물을 먹는 경우는 더 귀하다. 화살나무 새순이 홑잎나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드물다. 꾀꼬리버섯도 보기 힘들다. 꾀꼬리버섯은 외(오이)꽃버섯이라는 예쁜 별명도 가지고 있다. 먹을 수 있는 취나물이 20여 종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드물다. 참취, 곰취, 수리취 등만 흔하게 볼 수 있다. ‘봄 냉이는 향으로, 가을 냉이는 맛으로 먹는다’는 말이 있다. 이젠 “가을에도 냉이를 먹어요?”라고 묻는 이들이 더 많다.

우리는 나물에 관한 한 대단한 능력을 지닌 민족이다. 콩을 먹는 민족은 많지만 싹을 틔워 콩나물로 먹는 민족은 드물다. 파독 광부, 간호사들은 고사리를 먹지 않는 독일의 산속에서 고사리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흔히 가난했기 때문에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살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산나물, 들나물을 먹었다고 말한다. 틀렸다. 중세 유럽도 가난했다. 숱하게 굶고 또 죽었다.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한꺼번에 수백만 명이 죽기도 했다. 일본도 우리보다 더 오랜 기간 대기근을 겪었다. 덴메이 대기근 시기(1782∼1788)에는 식인도 서슴지 않았다. 모두 어려웠지만 유독 우리만 나물 문화를 잇고 발전시켰다.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먹을거리에 대한 호기심이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아일보와 한국일보에서 일했던 언론인 홍승면(1927∼1983)의 말이다.

“나물 문화는 우리 핏속에 녹아 있다. 일제강점기, 북간도에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다.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러시아 사람들 그리고 주변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그중 조선 사람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른 봄, 나물바구니를 끼고 산에 오르는 이들은 모두 조선 사람이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조선 사람들은 봄만 되면 산과 들로 나물을 캐러 다녔다.”

‘가난했기 때문에 나물을 먹었다’는 엉터리 주장이 소중한 나물 문화를 무너뜨렸다. 나물은 귀한 식재료가 아니라 싸구려, 천한 식재료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조금씩 나아지니 ‘싸구려 식재료인 나물’을 멀리한다.

‘나물의 약효’를 주장하는 이들도 나물 문화를 무너뜨렸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무슨 풀 하나로 병이 낫는다는 주장이 그 나물, 먹을거리를 망가뜨린다. 우르르 몰렸다가 어느 순간 관심이 식고 그 나물이 사라진다. 고혈압에 좋은 나물이 있다면 약국에서 팔 일이다. 시력 회복에 좋다면 안과 의사가 권해야 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함부로 시력 회복 ‘약’을 팔 일은 아니다.

1611년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쓴 허균은 우리나라 최초의 맛 칼럼니스트다. ‘도문대작’ 첫머리는 허균이 어린 시절 외가 강릉에서 먹었던 방풍나물죽 이야기다. 방풍나물이 고혈압 예방에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부분의 끝은 ‘사기그릇에 담아서 먹었던 방풍나물죽의 향기가 2, 3일 입안에 남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물 향이 며칠씩 입에 남는다고 말하는 민족이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전호나물#초근목피#음식디미방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