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참혹한 시대 이어온 갑질… 남루한 사람들의 고통 그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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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에 자전적 장편소설 ‘공터에서’ 펴낸 소설가 김훈

6년 만에 새 장편소설 ‘공터에서’를 낸 소설가 김훈 씨는 6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소설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 순수한 생명의 원형이 드러나는 걸 희망으로 제시했지만 (스스로) 한심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라면서도 “이념으로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해냄출판사 제공
6년 만에 새 장편소설 ‘공터에서’를 낸 소설가 김훈 씨는 6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소설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 순수한 생명의 원형이 드러나는 걸 희망으로 제시했지만 (스스로) 한심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라면서도 “이념으로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해냄출판사 제공
“역사의 하중, 시대가 개인에게 가하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도망 다니고, 시대를 부인하고, 미치광이가 돼 바깥을 떠도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소설가 김훈 씨(69)가 2011년 ‘흑산’을 낸 지 6년 만에 장편소설 ‘공터에서’(해냄)를 발간했다. 6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터에서’는 1910년생으로 만주와 상하이 등지를 떠돌다 귀국해 6·25전쟁을 겪은 마동수와 가족의 삶을 그렸다. 마동수는 흥남 철수로 피란했지만 남편과 자식을 잃은 이도순을 부산에서 만나 두 아들 장세와 차세를 낳는다. 김 씨는 “돌아가신 내 아버지는 1910년 우리나라가 망해서 없어지던 해 태어났고, 나는 그 나라를 다시 만들어 정부 수립을 하던 1948년 태어났다”며 “이번 소설은 내가 살아온 시대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 속 마동수는 김 씨의 부친인 김광주 씨(1910∼1973)를 모티브로 형상화했다. 김광주 씨는 광복 뒤 언론사 문화부장으로 일했으며, 한국 무협지의 효시로 알려진 ‘정협지’(1961년)와 단편소설 등을 썼던 소설가다. 마동수와 김 씨는 만주 길림에서 의원을 운영하던 형이 의학 공부를 권유해 상하이로 건너갔고, 아나키스트 조직 등에 관여하면서 문예운동을 벌였다는 점에서 이력이 상당히 겹친다.

김훈 씨는 “마동수는 내 아버지와 그 시대 많은 아버지를 합성해 만든 인물”이라며 “중국에서 돌아온 그들은 크고, 몽롱하고, 가파른 말투를 사용하는 언어의 협객들이면서 현실에서는 뿌리 뽑힌 이들이었다”고 했다. 또 “그 시대 상하이에서 돌아온 이들이 한 말은 대부분 과장이고 허장성세였다”며 “아버지 역시 내가 보기에는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수많은 유랑청년 중 하나였다”고 덧붙였다.

소설에는 말의 이미지가 많다. 주인공의 성이 마(馬)씨이고 소설 마지막 부분이나 표지에도 말이 등장한다.

김 씨는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늙은 말이 갈기가 눈을 덮은 채 힘없이 광야를 헤매다 터덜터덜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며 “아버지의 모습을 말에 투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설 제목에 대해서는 “공터는 역사적 구조물이 들어서지 않은, 집 사이의 버려진 땅으로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를 비유했다”고 했다. 자신도 “계속 철거되는 가건물에서 살아왔다는 비애감이 든다”고 했다.

김 씨는 “이 땅에서 70년 가까이 살면서 우리 시대의 야만성과 폭력이 소름끼치게 무섭다”고 말했다. 그는 6·25전쟁을 소설에 담기 위해 당시의 신문을 읽었다고 한다. 김 씨는 “1·4후퇴 당시 고관대작들이 징발한 군용차 관용차에 응접 (가구) 세트와 피아노를 싣고 피란민 사이로 먼지를 날리며 남쪽으로 질주해 내려갔다”며 “이 같은 ‘갑질’이 악의 유습으로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내 소설에 영웅이나 저항하는 인간은 나오지 않는다”며 “나나 부친이나 모두 시대의 참혹한 피해자”라고 말했다.

김 씨는 최근 정국에서 촛불집회와 탄핵반대 집회에 관한 물음에도 답했다. 그는 양 집회를 현장에서 관찰해 봤다고 한다. 그는 ‘태극기 집회’에 관해 “우리 세대는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가 안 되던 시절 사춘기를 보냈다. 상사 해외 주재원으로 가발을 수출하며 달러를 한국에 송금한 사람들이 내 친구들이고, 이들이 태극기 집회에 나간다”며 “이들이 집회에서 ‘우리가 쌓아온 것이 다 무너져 간다’고 한탄하는 건 기아와 적화(赤化)에 대한 두려움이 근원적인 정서가 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공터에서#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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