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국제부장의 글로벌 이슈&]‘역사의 종말’의 종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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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적인 세계화론자인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왼쪽)와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오른쪽)는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의 반세계화 독주를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동아일보DB
미국의 대표적인 세계화론자인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왼쪽)와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오른쪽)는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의 반세계화 독주를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신석호 국제부장
신석호 국제부장
 반(反)이민 행정명령의 미국 내 효력을 정지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 방’ 먹인 3일 시애틀 연방지방법원 결정이 나온 뒤 두 사람의 안도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와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 특히 소련 붕괴 이후 정치적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적 금융자본주의 경제의 지구적 확장을 이론적, 경험적으로 정당화해 온 두 석학은 취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트럼프의 반세계화 정책에 비판을 가해왔다.

 프리드먼은 1일 NYT 기명 칼럼을 통해 미국의 경제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써 “부디 트럼프가 주는 당근(세금 감면과 규제 개혁 등)에 현혹되지 말라. 당신과 당신의 직원들은 벽(반세계화 조치들)을 세우는 세상이 아니라 벽이 없는 세상에서만 번창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트럼프가 가고 있는 반세계화의 길은 미국과 세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데 미국 정치권도, 언론도, 사위 재러드 쿠슈너도 막을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사법부는 언급하지 않은 채 세계화 진영이 기댈 대상은 트럼프가 존경하고 말을 듣는 유일한 집단인 빌 게이츠와 마크 저커버그, 일론 머스크 등 성공한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들뿐이라고 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요즘 ‘견제와 균형’을 특징으로 하는 미국 정치 시스템이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독주’를 얼마나 막아낼 것인지에 관심이 많다. 지난달 23일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를 통해 “미국이 법치국가인지 인치국가인지를 가늠할 현실 세계의 실험이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취임 후 일련의 반세계화 흐름을 주도하는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 등은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되찾아준다는 명분으로 미국을 1950년대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고 프리드먼은 경고했다. ‘세계인’이 아닌 기독교 백인이 지배하고 히스패닉과 무슬림 등 이민족을 배제하며 그저 그런 수준의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이 고임금을 받고 평생 공부할 필요도 없었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세상 말이다.

 2000년 한국어판이 출간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등을 통해 세계화의 불가피성을 역설해 온 프리드먼은 성난 백인 남성 노동자 계층의 오해를 풀면 트럼프의 반세계화 폭주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도 세계화가 선진국의 고숙련 전문직과 아시아의 신흥 중산계급을 살찌우는 동안 어정쩡한 서구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줄어든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주된 원인은 트럼프가 생각하듯 중국과 멕시코 등과의 자유무역이 아니라 컴퓨터와 인터넷 등 정보기술(IT)의 발달이라고 주장한다.

 1992년 ‘역사의 종말과 마지막 인간’을 통해 소련 붕괴로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와 권위주의를 이겨 이념 투쟁으로서의 역사가 끝났다고 선언했던 후쿠야마 교수는 ‘트럼피즘’을 일개 미국 행정부나 정책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선언한 ‘역사의 종말’의 끝에 버금가는 인류 사상사적 변화 차원에서 보는 것 같다.

 트럼프 당선 직후인 지난해 11월 11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미국 정치뿐만 아니라 세계 질서에도 획기적인 사건”이라며 “1950년대부터 미국이 구축한 자유주의적 세계 질서가 후퇴하고 ‘대중영합적 민족주의(populist nationalism)’라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고 선언했다. 각국의 성난 민족주의가 서로 경쟁할 경우의 파장은 1989년 독일 베를린장벽 붕괴에 버금간다는 것이다.

 후쿠야마와 프리드먼은 대학 1학년 때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목도한 필자의 세계화 선생님이었다. 특히 ‘황금구속복’(세계화가 요구하는 기준과 행동양식)을 입고 ‘맥몽드’(맥도널드 햄버거가 진출한 나라들로 상징되는 열린 세계)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는 최고의 ‘세계화 사용 설명서’였다.

 한국도 이들이 설파한 세계화의 수혜자였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라는 호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과감하게 황금구속복을 갖추어 입고 맥몽드에 뛰어든 덕분에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자동차 같은 글로벌 기업을 키워냈다. 많은 인재들이 해외에서 지식과 경험을 쌓았고, 무역의존도가 90%에 이르는 통상국가로 우뚝 섰다. 세계화 시스템이 없었다면 한국은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세계화는 오래전부터 그 진원인 미국, 뉴욕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2001년 뉴욕 9·11테러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시작된 경제위기는 미국의 정치, 경제적 후덕함을 앗아갔다. 뉴욕 출신인 트럼프는 “20조 달러 빚더미 위에 앉은 미국에 더 이상 기대하지 말라”고 선언하는 듯하다. 그가 이끄는 ‘역사의 종말’ 종언 이후의 세상이 무엇일지, 세계 변화를 주도할 수 없는 주변부 국가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걱정스러운 눈으로 중심부의 변화를 바라보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신석호 국제부장 kyle@donga.com
#프리드먼#후쿠야마#견제와 균형#스티브 배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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