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허문 ‘미국의 정신’… 변방의 판사가 다시 세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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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이민정책 제동]시애틀 연방지방법원 로바트 판사, 7개국 입국금지 행정명령 정지

반이민 행정명령을 가로막은 제임스 로바트 판사. 사진 출처 데일리메일
반이민 행정명령을 가로막은 제임스 로바트 판사. 사진 출처 데일리메일
 미국 수도인 워싱턴에서 서북쪽으로 4500여 km, 비행기로 6시간가량 떨어진 워싱턴 주 시애틀의 한 향판(鄕判·지방 판사)이 전 세계적인 파장을 낳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반(反)이민 행정명령을 막아섰다. 대통령도 법 아래에 있다는 법치주의 및 사법부 독립의 원칙과 함께 행정부의 전횡을 막기 위해 3권 분립의 ‘견제와 균형’ 원칙을 못 박은 미국 헌법 정신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시애틀 연방지방법원 제임스 로바트 판사(70)는 3일(현지 시간) “워싱턴 주가 현재 벌어지는 (이민 규제 행정명령 반대) 집회로 부담을 느끼고 있고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라며 미 전역에서 반이민 행정명령 집행을 잠정 중단하라고 결정했다. 그는 이날 행정부 변호인인 연방 법무부의 미셸 베넷 변호사에게 9·11테러 이후 이슬람 7개국 출신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있었는지 물은 뒤 “이에 대한 답이 ‘없다’라면 당신들(정부)은 그 나라 출신들로부터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에 전혀 근거를 대지 못하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행정명령 발표 후 뉴욕, 미시간 주 등에서 행정명령 효력을 일시 정지한 적은 있으나 전국 단위 효력을 정지시킨 결정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소송을 주도한 밥 퍼거슨 워싱턴 주 법무장관은 판결 후 “법원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은 대통령의 의무다.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라며 환호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건 로바트 판사는 미국에서도 진보적 성향이 강한 곳으로 손꼽히는 시애틀 출신이다. 수도 워싱턴의 조지타운대 로스쿨 졸업 후 줄곧 시애틀의 ‘레인 파월 모스&밀러’ 로펌에서 일하다 2004년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현재의 자리에 지명됐다. 트럼프로서는 공화당 경선 때부터 사이가 틀어진 ‘부시 가문의 저주’에 또 휘말린 셈이다.

 변호사 시절 워싱턴 주의 정신질환 아동 등 사회적 약자를 돕는 법률 서비스 제공에 관심이 많았던 로바트 판사는 2004년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돕도록 법원을 운영하겠다”라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미 판사 중 1%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미국 재판관단(The American College of Trial Lawyers)’의 일원이기도 한 그는 합리적인 보수 성향이지만 지난해 판결에선 “흑인들의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소신을 밝힌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미 사회는 로바트 판사의 판결로 “이민자를 수용해 온 미국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게 됐다”라며 환호했다.

 연방지방법원의 결정을 재고해 달라는 연방 법무부의 긴급 요청을 기각한 연방항소법원은 6일까지 법무부와 워싱턴 주 정부에 추가 입장을 제출하라고 전달했다. 항소법원이 연방 법무부의 항고를 최종 기각하고, 행정부가 재항고에 나서면 공은 연방대법원으로 넘어간다. 최종 결론까지는 1년 이상 걸릴 것으로 보인다.

 플로리다에서 가족 휴가 중 연방지방법원 결정 소식을 접한 트럼프는 “이른바 판사라는 사람의 의견은 터무니없으며 뒤집힐 것”이라고 로바트 판사를 맹비난했다. 워싱턴 정가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국정 장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법정 투쟁과는 별개로 제2, 제3의 행정명령을 발동해 이민 규제 이슈를 밀어붙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 황인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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