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의존증 겪어봐서 그 맘 알죠”… 동병상련 노숙인 돕는 脫노숙인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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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과정 거쳐 의무보조원 새 삶… “환자 보면 힘든 노숙생활 떠올라”
행려병자 보듬는 수호천사로

1월 26일 서울 동대문구 무학로 서울시동부병원에서 노숙인 출신의 한 의무보조원이 알코올의존증 노숙인 환자를 돌보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1월 26일 서울 동대문구 무학로 서울시동부병원에서 노숙인 출신의 한 의무보조원이 알코올의존증 노숙인 환자를 돌보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무심코 술잔을 들었는데 어제 본 환자 얼굴이 아른거려서 바로 내려놨어요.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요. 이제는 정말 사람답게 살고 싶어요.”

 20대 때 가구업체에서 일을 시작한 현모 씨(45). 기술이 좋아 공장에서 일찍 자리를 잡았다. 그가 공구 대신 술병을 손에 들기 시작한 건 1997년 무렵. 멀쩡하던 왼쪽 눈이 흐려지면서부터다. ‘이제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봐야 한다’는 의사의 무덤덤한 말은 기술로 먹고사는 현 씨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집어든 술병은 하루가 무섭게 쌓여 갔다. 어린 딸과 아내를 떠나 거리를 전전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성실한 20대 청년이 술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알코올의존증 환자’로 바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곁을 지키던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빈 술병이 빈자리를 채웠다. 거리 생활이 길어질수록 삶에 대한 의지는 점점 약해졌다.

 지난해 7월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술에 취해 거리에서 죽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돌이 생활을 접고 노숙인 시설로 들어갔다. 현 씨가 본격적으로 마음을 다잡은 건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도우면서다. 그는 서울시 자활프로그램을 통해 지난해 12월 서울시동부병원 의무보조원으로 채용됐다. 그가 돌보는 환자는 대부분 비슷한 아픔을 가진 ‘알코올의존증 행려병자’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26일 현 씨가 미는 휠체어에 앉아 병실에 온 환자도 얼마 전 응급실로 실려 온 알코올의존증 노숙인이었다. 발견 당시 그의 체온은 33.6도. 조금만 늦었다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응급처치 덕에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잦은 음주로 이미 뇌가 손상된 남성은 혼자 거동조차 하지 못했다.

 현 씨는 기꺼이 그의 손발 역할을 했다. 가족처럼 팔다리를 천천히 들어 조심스럽게 그를 침대 위에 눕히고 30분 넘게 온몸을 주물렀다. 그의 말벗이 돼 준 것도 현 씨였다. 이날 남성을 찾아온 면회객은 아무도 없었지만 현 씨 등 의무보조원들은 하루 종일 그의 곁을 지켰다.

 의무보조원들에게 병원은 단순한 일터가 아닌 자신을 되돌아보는 특별한 공간이다. 현 씨는 “환자들의 모습에서 나의 과거와 아픔을 본다”며 “술병을 잡다가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린다”고 말했다. 응급실에서 만난 의무보조원 박모 씨(34)도 “환자들을 보면 힘겨웠던 노숙생활이 떠오른다”면서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고 말했다. 

 의무보조원이 배치되면서 의료진의 부담도 줄었다. 이경란 서울시동부병원 수간호사는 “병원에 실려 오는 알코올의존증 노숙인들은 언제 돌발 행동을 할지 몰라 24시간 돌봄이 필요한데 간호사들이 감당하기 힘들 때가 많다”며 “이제는 의무보조원 덕분에 노숙인 치료와 간호에 큰 어려움이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짧은 활동 기간’은 여전히 걸림돌이다. 고영상 서울시동부병원 응급실장은 “계약기간이 11개월로 너무 짧아 종료 후 또다시 거리로 돌아갈 우려가 있다”며 “활동 기간을 현실화해 이들이 사회에 무사히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알코올의존증#행려병자#자활#의무보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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