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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달 애태운 접시 반쪽 찾은 날 ‘기쁨의 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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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달 애태운 접시 반쪽 찾은 날 ‘기쁨의 회식’

김상운 기자 입력 2016-05-26 03:00수정 2016-05-2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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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9>고구려 ‘아차산 보루’ 발굴, 최종택 고려대 교수
20일 서울 광진구 아차산 4보루 출입 시설 앞에서 최종택 고려대 교수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20일 서울 광진구 아차산 등산로. 가파른 산길을 지나 능선을 따라 1시간을 걷자 어른 키 높이의 성벽이 나타났다. 고구려 산성의 전형적인 방어 시설 ‘치(雉·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의 접근을 관찰하거나 막기 위한 시설)’도 보인다. 남한 최대의 고구려 유적인 아차산 보루 중 4보루다. 명칭은 4보루이지만 1997년 아차산 보루 중 처음 발굴됐다. 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장관이다. 삼국시대 군사 요충지답게 한강과 중랑천 주변은 물론이고 멀리 몽촌토성과 풍납토성까지 조망할 수 있다.

최종택 교수가 2005년 아차산 3보루에서 고구려 토기를 발굴하고 있다(위 사진). 1997년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後部都○兄’ 명문 토기. 최종택 교수 제공
함께 산에 오른 최종택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52)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보루 북쪽을 가리켰다. “저곳에 군용 헬기장이 있었습니다. ‘H’ 표시의 돌 가운데 고구려 온돌에 쓰인 뚜껑돌도 있었죠. 여기서 19년 전인 1997년 9월 23일 고유제(告由祭)를 올리고 바로 땅을 팠습니다.”

○ 그토록 찾아 헤맨 ‘반쪽’을 찾다

1997년 10월 25일 아차산 4보루 중앙부에서 둥근 토기 접시 하나가 나왔다. 토기 조각은 여럿 나왔지만 이것은 차원이 달랐다. 최종택은 고고학자가 일생에 한 번도 만져 보기 힘든 ‘대박’임을 직감했다. 반으로 쪼개진 접시 한쪽에 세로로 새겨진 글자가 있었던 것. 흥분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명문을 차근차근 해석했다. ‘후부도(後部都)’였다. 그런데 일부러 깬 듯한 그릇 단면에서 글자가 그만 끊어지고 말았다. 단면에 낀 이끼로 추정컨대 오래전에 깨진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완전한 명문을 찾아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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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마산 2보루에서 출토된 각종 토기류. 서울대 박물관
이때부터 지난한 토기 색출 작업이 시작됐다. 발굴을 위해 판 흙을 모두 수거해 일일이 체로 걸러봤지만 허사였다. 산을 내려가 그동안 찾아낸 토기 조각들을 풀어 놓고 하나씩 다시 조사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쪽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최종택은 가슴을 치며 안타까움을 삭여야 했다.

홍련봉 1보루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 최종택 교수 제공
지성이면 감천인가. 그토록 찾아 헤맨 반쪽은 이듬해 7월 30일 결국 발견됐다. 처음 반쪽을 찾아낸 곳에서 남쪽으로 불과 2, 3m 떨어진 지점이었다. 파낸 흙을 따로 쌓아 둘 공간이 없는 산성 발굴의 특수성이 빚은 해프닝이었다. 즉 1997년 발굴에서 ‘후부도’ 조각이 나온 지점을 경계로 남쪽 면에 흙을 쌓으면서 나머지 반쪽을 놓친 것이다. “9개월 동안 애를 태우다 반쪽을 찾아냈을 때의 환희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날 발굴단원들과 거나하게 한잔했지요.”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토기의 각종 명문들. 서울대 박물관
나머지 반쪽 그릇에는 ‘○兄(형)’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었다. 두 쪽을 모두 합치면 ‘後部都○兄’. 최종택은 후부(後部)를 고구려가 당시 한강 유역을 나눈 일부 행정구역으로, 도○형(都○兄)은 인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다. 여기서 형은 현대의 씨(氏)처럼 고구려 특유의 존칭어구로 보인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는 고구려가 한강 이남에서 단순히 치고 빠지기 식의 군사 점령이 아닌 행정 지배를 시도한 사실과 더불어 고구려의 언어 습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 쇠솥 나온 ‘구의동 보루’ 기습에 전멸 당한 듯

구의동 보루의 온돌 아궁이에서 출토된 쇠솥. 서울대 박물관
아차산 보루는 출토 토기의 양식을 감안할 때 서기 500년경 축조돼 백제-신라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물러난 551년경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고구려의 남쪽 최전방 군사기지였다. 최종택은 장수왕이 한강을 빼앗고 남진을 본격화한 475년 이후부터 500년 직전까지 고구려는 보루 없이 몽촌토성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으로 본다.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투구. 서울대 박물관
아차산 보루의 고고학 증거들은 551년 후퇴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예컨대 한강변에 있는 데다 소규모(10명) 병력만 주둔해 백제군의 공격에 가장 취약했던 구의동 보루에서는 쇠솥과 무기류가 꽤 출토됐다. 반면 약 100명의 군사가 산 위에 자리 잡아 기습을 피할 수 있었던 아차산 4보루에서는 쇠솥이 발견되지 않았고 무기류도 별로 없었다. 다음은 최종택의 해석. “구의동 보루는 백제군의 기습으로 전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에 비해 시간을 벌 수 있었던 아차산 4보루 고구려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쇠솥과 무기를 챙겨 철수한 걸로 보입니다. 심지어 이곳 지휘관의 투구가 아궁이에서 발견됐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고구려 지휘관이 철수에 방해될까 봐 무거운 투구를 버렸을 가능성이 있죠.”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각종 토기류. 최종택 교수 제공
끝으로 20년 가까이 아차산 발굴에 몰두한 그에게 남은 학문적 과제를 물었다. “고구려 연구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 출토 유물이 적어 부실한 편입니다. 특히 토기나 마구 등 유물을 통한 편년(연도를 설정하는 것) 연구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통일이 이뤄지기 전에 고구려 박물관을 세워 남북을 아우르는 고구려 연구, 교육의 허브를 만드는 꿈도 갖고 있어요.”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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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구려 아차산 보루#구의동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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