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형의 생각하는 미술관]<20>피고 지는 꽃의 나날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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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브뤼헐의 ‘도자기 화병에 담긴 꽃다발’.
얀 브뤼헐의 ‘도자기 화병에 담긴 꽃다발’.
얀 브뤼헐(1568∼1625)은 꽃 정물화의 대가입니다. 하나의 정물화에 100여 종의 꽃을 그렸지요.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생김과 자태가 빛나지 않는 꽃이 없습니다. 당대인들은 이런 화가를 ‘꽃 브뤼헐’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럽에서 식물은 의학적 효용의 관점에서 주목되었습니다. 16세기 식물학이 의학에서 분리되면서 식물 자체로 관심 대상이 바뀌었지요. 이 무렵 꽃이 독자적인 미술 소재로 다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화가는 초기 꽃 정물화의 전형을 만든 선구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도자기 화병에 담긴 꽃다발’은 작은 식물원을 방불케 합니다. 그림에는 백합과 아이리스를 비롯해 튤립 작약 수레국화 장미 붓꽃 물망초 수선화 백합 카네이션 등 각양각색의 꽃들이 등장합니다. 다채로운 것은 꽃의 크기와 빛깔만이 아닙니다. 만개 시기도 제각각입니다. 꽃에 무지해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화가는 꽃에 관한 지식이 해박했지요. 직접 정원을 돌보고, 관찰을 쉬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없는 꽃을 상상으로 그리기를 경계하며 사실에 바탕을 둔 꽃 정물화를 고수했습니다.

그림 속 개화 시기가 다른 꽃들은 의미가 특별합니다. 피고 지는 꽃은 덧없는 삶을 상징합니다. 사계절 꽃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삶의 상징이라니 화병도 각별한 뜻이 있겠군요. 꽃병은 순환하는 삶이 펼쳐지는 물과 땅, 불과 해가 어우러진 우주를 은유했습니다. 그림 속 도자기 화병 앞면 좌우에 바다의 신과 풍작의 신을 그려 넣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마 화병 뒷면은 불의 신과 태양의 신이 차지하고 있겠지요. 절정의 순간 꽃이 가득한 화가의 그림은 소멸의 사건을 호출합니다.

성년의 날이었던 지난주 월요일은 애도의 날이기도 했습니다. 학기 중 급작스레 타계한 교수님의 추도식이 학교에서 이른 아침 거행되었지요. 추모식이 끝나자 교내에 설치된 분향소로 향하는 국화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루 종일 갓 스무 살이 된 젊음들에게 장미 축하도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에 휴일이어서 하루 늦게 도착한 스승의 날 카네이션 바구니까지 손에 들려 있던 때문일까요. 하얀 꽃송이와 붉은 꽃다발이 한데 뒤섞여 물결치는 세상이 거대한 꽃 정물화 같았습니다. 지금 나는 무슨 빛깔, 어떤 삶의 계절을 통과하고 있을까. 추모객들 손에 조심스레 들린 작별의 꽃과 청춘들 가슴에 벅차게 안긴 설렘의 꽃 사이에서 문득 궁금했습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
#얀 브뤼헐#도자기 화병에 담긴 꽃다발#꽃 브뤼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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