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D/Topic] 몽고반점…한민족의 DNA가 면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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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년 5월 10일 13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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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의 종횡무진 시간기행 ②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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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발, 로마 행 대한항공 여객기 비즈니스 좌석. P씨는 여태까지 이코노미석 단골 여행자였으나 이번에 처음으로 비즈니스석에 앉아보았다. 비싼 만큼 넓고 안락했다. 화려한 오페라 가수를 포기한 대신 ‘밥장사’에 나섰으니 돈이라도 여유 있게 쓰고 싶었다.

플라스틱 성형업체를 경영하는 친지 어른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메세(박람회)에 다녀온 뒤 1등석에 앉아봤다며 큰 소리로 자랑하던 말이 귀에 맴돌았다.

“돈 쓰는 맛나데. 1등석에 턱 앉으이까 수추아데싸(스튜어디스) 아가씨들이 나를 황제처럼 모시더라. 탁 꿇어앉아 뭐 드시겠습니까, 뭐 불편한 것 없으십니까 하고 묻더라. 온갖 포도주에 치즈를 갖다 바치는데 내 입맛에 맞지 않아 많이 묵지는 못했지만 기분은 끝내주더라. 라면 낄이(끓여) 달라 하니 계란도 넣어주데. 컵라면 말고 봉지 라면으로 말이야. 1만m 상공에서 맛보는 라면, 직이(죽여)주데! 거래처에 가서 온갖 갑질 당할 때는 사업 때려 치야뿌리겠다고 멫 번이나 다짐했는데 퍼스트 쿠라수(클래스)에 앉으이 그 수모 잘 견뎠다는 생각이 들데. 폼 나게 돈 쓰는 재미에 사업하는 거 앙이겠나?”

P씨가 그 어른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더니 어른은 더욱 의기양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구로공단 공장에 ‘시다바리’로 들어가 오늘날 번듯한 업체의 사장이 된 그분은 중․고교 졸업장과 학사, 석사 학위도 돈을 주고 샀다고 한다. 무슨 협회니 조합이니 하는 단체의 장에도 출마해 낙선, 당선도 했다. 명문대 AMP(최고경영자 과정) 과정도 두 군데나 마쳤다.

“AMP 동창 모임에 가면 스카이 대학 나온 양반들, 간뎅이가 콩알보다 작은 쪼다들이야. 기껏해야 회비 정도 내는 수준이고 통 크게 전체 회식비 쏘는 기마에 가진 호걸이 없더라. 모도(모두) 좀팽이들이지! 으이그, 쪼잔한 놈들!”

기내에서 펼쳐 든 여러 신문에 사촌 형의 국회의원 당선 소식이 보도되었다. 초선이니 그리 중요한 인물도 아닌데도 몇몇 신문에는 인터뷰까지 실렸다. 사촌 형은 관광 전문가로 소개되었으며 앞으로 중국인 관광객이 대거 몰려올 ‘한류 관광시대’에 대비해 관광진흥책 관련 입법에 기여할 인물로 부각됐다.

P씨의 머리에 떠오르는 사촌 형 관련 키워드는 나이트클럽, 조폭, 룸살롱, 사채업자 등 암흑세계 투성이인데 신문들은 밝은 면만 조명했다. 2류 프로복서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도한 신문은 한 군데도 없었다. 최종 학력도 K대 경영대학원 석사로 표기됐다.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주먹 출신 형이 어떻게 명문 K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을까. 플라스틱 성형업체 사장인 친지 어른처럼 용역업체에 과제물 작성, 논문대필을 시킨 것 아닐까.

P씨는 비행기가 이륙한 직후 공항 면세점 서점에서 산 소설책 2권을 꺼내들었다. 기내에서 읽은 다음 로마의 ‘아리랑 식당’에 비치할 작정이다. 이상훈 작 <한복 입은 남자>와 한강 작 <채식주의자>. 어떤 책을 먼저 읽을까 살피다가 <채식주의자>를 펼쳤다. 한강이라는 여성작가의 이름이 특이하거니와 권위 있는 문학상인 맨부커(Man Booker)상 후보작으로 뽑혔다는 언론보도를 봐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등 여러 작품으로 이뤄진 연작 소설이었다. 주인공 영혜는 인간의 폭력성을 거부하려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극단적 채식주의자다. 영혜의 남편과 형부, 언니의 시선에서 각각 서술한 단편소설을 묶어 놓았다. ‘몽고반점’은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란다.

‘채식주의자’는 영혜 남편의 시선으로 그려졌다. 소녀 시절 개에 물린 영혜는 그 개가 죽임을 당한 후 그 끔직한 장면이 꿈에 나타나자 육식을 꺼린다. 언니 인혜의 집들이에서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자 장인(영혜의 아버지)은 영혜의 입을 억지로 벌려 고기를 넣으려 한다. 발악하며 거부하던 영혜는 흉기로 손목을 긋는다.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인 비디오 아티스트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그는 아내(인혜)에게서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시퍼런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말을 듣고 처제의 엉덩이를 보고싶어 한다. 그는 처제에게 비디오작품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간청한다. 벌거벗은 영혜의 몸에 보디페인팅을 해서 촬영하지만 만족하지 못해 남자 후배에게 영혜와의 섹스를 제안한다. 이 장면을 찍겠다 했더니 후배는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몸에 꽃을 그려 처제와 성애를 벌이며 자동카메라로 찍는다.

작중 인물들이 모두 도착증 환자로 보여 더 이상 읽기가 불편했다. 더욱이 P씨 옆 자리에 이탈리아인 젊은 부부와 젖먹이 아기가 앉아 있어 천진난만한 아기 눈동자를 보니 이런 ‘19금’ 같은 책을 읽는 게 죄스럽기도 했다. 아기 엄마에게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기가 참 귀엽군요. 몇 살이에요?”
“1년 2개월이에요.”

아기의 눈동자 색깔은 에메랄드 색이었다. 머리칼은 부드러운 금발.
두꺼운 안경을 쓴 아기 아버지에게 물었다.

“한국에 관광 오셨는지요?”
“관광이라기보다는… 고향 방문이지요.”
“고향?”
“예. 제 먼 조상이 한국에서 이탈리아로 간 분이랍니다. 400여 년 전에….”
“그럼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이탈리아에 노예로 팔려간 그 소년?”
“맞습니다. 조상의 뿌리를 찾아왔지요. 새로 태어난 아들에게 한국의 기운을 느끼게 해 줄 겸해서.”

P씨가 가진 역사 지식 대부분은 역사소설을 읽은 덕분이었다. 400여 년 전 이탈리아에 간 소년의 사연도 오세영 작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읽고 알았다.

오세영 작가는 1983년 영국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소묘화로서는 당시 경매 사상 최고가에 팔려서 화제가 된 네덜란드 화가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에서 착안해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P씨도 관련 자료를 찾다가 진단학회가 발간한 <한국사>에서 ‘세계를 일주하던 이탈리아 무역상 카를레티는 일본에서 조선인 포로 5명을 노예로 사서 세례를 받게 하고 그 가운데 1명을 1606년 이탈리아로 데려갔고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라고 기술된 내용을 찾았다.

안토니오는 이탈리아 여성과 결혼해 조선과 기후가 비슷한 알비(Albi)라는 소도시에 정착했단다. 요즘 ‘코레아 마을’로도 불리는 알비에는 300여 명의 코레아 성씨를 가진 시민이 살고 있으며 인근의 카탄차로, 타베르나 등지에도 코레아씨가 흩어져 산다고 한다. 로마의 전화번호부에도 코레아씨가 20여 명 보인다.

“실례지만 성함은?”
“로베르토 코레아입니다. 제 아들은 산드로 코레아….”
“한국을 방문하니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마음이 푸근해지더군요. 산하를 둘러보니 이미 와본 적이 있는 것처럼 기시감이 들고요.”

코레아씨 부자(父子)의 외모에서 한국인의 모습은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금발에 파란 눈, 전형적인 서양인 얼굴이었다.

<채식주의자>를 덮고 <한복 입은 남자>를 펼쳤다. 과거에 읽은 <베니스의 개성상인>과 비슷한 내용이거니 짐작했는데 앞부분을 읽어보니 주인공이 달랐다. 루벤스 그림의 한복 입은 남자는 안토니오 코레아가 아니라 세종대왕 시절 대표적인 과학기술자 장영실이라는 것이다. 물론 소설가의 머리에서 빚어진 허구다. 장영실은 임금이 타는 가마를 잘못 설계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가서 실종된다. 그 장영실이 중국 명나라의 정화 장군이 대선단을 끌고 항해를 떠날 때 동행해서 유럽에 갔다는 줄거리다. P씨는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에 감탄했다. 소설 속에서는 50대 장년 장영실이 베니스에 도착해 천재소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몹시 흔들렸다.

“승객 여러분, 이상기류 때문에 기체가 흔들리니 안전벨트를 매십시오.”

기내 방송이 흘러나오자 찰칵 하는 안전벨트 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비행기는 아래위로 심하게 요동쳤다.

산드로 코레아 아기가 놀라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아무리 달래도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기체가 다시 안정되었는데도 아기는 숨이 끊어지는 듯 곡성을 질렀다. 마침내 아기는 호흡이 거의 멎는 듯하더니 입술이 파래졌다.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승무원이 그 광경을 보고 기내 방송을 했다.

“기내에서 응급환자가 생겼습니다. 승객 가운데 의사가 계시면 승무원에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방송을 들은 S대 의과대학 K교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나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의사 면허증 소지자이니 이런 상황에서는 환자 진료에 나서는 것이 의무사항이다. 그러나 의사학(醫史學), 즉 의학의 역사를 전공하다보니 의사 면허증은 ‘장롱 면허’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따긴 했으나 시뻘건 피를 보면 현기증이 생기는 체질 탓에 임상 의사를 포기했다.

“갓난 아기가 호흡곤란으로 위급상황에 빠졌습니다. 의사가 계시면 속히 와주십시오!”

K교수는 군의관 시절 열차 안에서 경기(驚氣)를 일으켜 숨이 넘어가는 아기를 살려낸 어느 시골 할머니의 능숙한 처치 장면이 기억에 살아나 벌떡 일어섰다.

“제가 의사입니다만….”

승무원의 안내로 아기에게 다가온 K교수는 침착하게 아기의 옷을 홀딱 벗겼다. 발가벗은 아기의 몸이 드러나자 아기 부모는 질겁한 눈치였다. 이 상황에서 의사라 해도 무슨 수로 아기의 숨통을 틔우겠는가, 하고 걱정했다. K교수는 아기를 안더니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 쳤다. 아기는 앙,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이제 됐습니다.”

K교수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아기를 엄마에게 넘긴다. 엄마가 아기를 안고 한참 어르니 울음을 그친다. 승객 모두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P씨도 가슴을 활짝 폈다.

P씨는 엄마 품에 안긴 아기의 엉덩이를 바라보다 놀랐다. 시퍼런 멍자국이 보였다. 아까 의사가 너무 세게 때려 멍이 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스치다가 얼른 고개를 저으며 실소했다.

“몽고반점!”

산드로 코레아 아기의 몸에 한민족의 DNA가 면면히 이어짐을 나타내는 징표가 아니겠는가.
고승철 소설가 songche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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