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 신문인 외길 64년… 조선일보 성장 이끌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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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오른쪽)이 지난해 12월 열린 송년회에서 조선일
보 퇴직 직원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 제공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오른쪽)이 지난해 12월 열린 송년회에서 조선일 보 퇴직 직원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 제공
8일 별세한 방우영 상임고문(88)은 조선일보 사장과 회장을 지내며 조선일보의 성장을 이뤄낸 신문경영인이었다. 고인은 스스로를 “언론인이 아니라 신문인”이라며 “좋은 신문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일꾼”이라고 말했다.

1952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후 사회부, 경제부 기자를 지냈으며 1960년 조선일보 계열사인 아카데미극장 대표를 맡았다. 1962년 조선일보 상무로 복귀해 발행인을 거쳐 전무 대표이사가 됐고 1970년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하며 성장의 초석을 다졌다. 고인은 제호 빼고는 모두 바꾸라며 개혁을 단행했고, 1960년대 초반 10만 부를 밑돌던 조선일보 발행부수는 가파르게 늘어났다. 고인은 재정 독립을 못 하면 언론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1980년 월간조선을, 1990년에는 스포츠조선을 각각 창간해 매체 다각화에 나섰다.

스스로 다양한 특집기사, 연재소설, 인터뷰 등 아이디어를 내 지면의 변화를 시도했다. 1983년 시작해 23년간 6702회 게재되며 한국 언론 사상 최장 칼럼 기록을 세운 ‘이규태 코너’도 고인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일본 출장을 다녀올 때면 수십 권씩 책을 사다 주며 칼럼 집필을 독려하는 등 용인술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3년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 자리를 형 방일영 전 회장의 장남이자 조카인 방상훈 씨에게 물려주고 고인은 대표이사 회장이 됐다.

2008년 팔순 기념으로 언론계 생활을 담은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를 펴냈다. 고인은 “밤새 전쟁을 치르듯 만든 신문이 전해지는 매일 아침, 신문을 펼치는 독자들이 우리 신문에 만족할지 언제나 가슴이 떨렸다”고 회고했다. 고인이 논설위원들에게 비판 정신을 강조하며 던진 “욕먹을 각오하라우”라는 말은 유명하다.

올해 1월에는 미수(米壽)를 기념해 ‘신문인 방우영’을 펴냈다. 또 다른 저서로는 ‘조선일보와 45년’(1998년)이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무궁화장,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독일 1등십자공로훈장 등을 받았고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연세대 재단 이사장, 대한골프협회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영결예배는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영결식장에서 12일 오전 8시에 치러진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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