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이탈리아 : 베네치아·피렌체

  • 입력 2016년 3월 25일 14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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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로망 품고 왔지만 퇴락과 불편이 엄습
‘유럽의 가장 웅장한 응접실’ 산마르코광장, 노을빛과 절묘한 ‘두오모 돔’

한국을 떠난 지 어느덧 반년이 흘렀다. 때론 흘러가는 구름처럼 잠시 머물거나, 때론 현지인이 돼 오래 머물기도 했던 이번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인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이 곳을 최후의 여행지로 선택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연신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법한 이상한 나라가 내게는 이탈리아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대한 환상, 서양문명을 대표하는 고대도시 로마의 기대는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 각인돼 있었다.

최후의 통첩을 알리듯 당당히 이탈리아에 입국했다. 여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긴 여정의 끝에서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경제적인 조건이라는 한계와 ‘의미 없는 행복’이란 무의식이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느낀 이탈리아는 가이드북 한 켠에 자리잡은 화려한 말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현실성 있는 표현들은 어쩌면 불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콤한 말로 미화하는 것보다 여행자들과 함께 느낀 것을 더 사실적으로 표현해보려 한다.

#. 아름답지만 불편한 물의 도시 : 베네치아

선착순으로 좌석을 배정하는 저가항공 창가자리를 점령하는 데 여행의 마지막 에너지를 소진했다. 베네치아 공항에 다다르자 물에 닿을 듯 착륙하는 비행기의 아찔함에 환호성을 지를 틈도 잠시, 길어진 어둠이 낯선 도시의 환영을 잠식한다. 꾀죄죄한 겁쟁이 여행자는 호스텔월드를 뒤져 가장 싼 숙소로 향한다. 본섬이 아닌 외곽 공항 부근에 위치한 캠핑장이다.

6유로(약 1만원)라는 비싼 버스 요금(교통카드 포함가격)에 투덜거리며 버스에 올라탔다. 바짝 긴장한 채 휴대폰의 축약된 지도를 보며 내릴 지점을 추리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버스는 나를 이상한 곳에 내려준다. 최근 변동된 노선 덕분에 어두컴컴한 곳을 무려 한 시간이나 걸었다. 어렵게 찾은 숙소는 정확히 9.8유로(한화 약 1만5000원)의 값어치를 했다. 병원 주사실에 있을 법한 매트 두 개만 덩그러니 텐트 안에 있을 뿐 콘센트조차 없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일까, 휴대폰 충전 연결 단자가 드디어 고장이 났다. 별 수 없이 배터리가 10%밖에 남지 않아 꺼질 듯 아슬아슬한 노트북을 조심스레 열어 세면용품을 찾는다. 2인용 쉐어 텐트에 부디 부랑자가 들어오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빌며 힘든 환영의 날이 지나간다.

베네치아는 라군 위에 건설된 도시로 110여개의 섬이 오밀조밀 연결돼 있다. 본섬은 S자 형태의 대운하가 관통하고 있고, 차량 진입이 불가능해 대중교통이라곤 오로지 배 뿐이다. 이런 지형적 특성은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유일무이하다. 모든 것은 유독 베네치아를 로맨틱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다음날 베네치아 본섬으로 향했지만 정해진 숙소는 없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만 차량이 없다는 점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 섬의 미로 같은 길에서는 자칫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기 십상이고, 많은 관광객 무리 틈새를 비집고 힘들게 이동해야만 했다. 더구나 숙소 가격은 상상 이상으로 비싸다. 어렵사리 방을 구한 뒤 긍정적인 마음을 잡아보며 본격적인 베네치아 산책에 나섰다.

지극히 이국적인 풍경은 마음을 흔들었다. 운하를 따라 걷다보니 이곳에 터전을 둔 ‘베니스의 상인’들이 보인다. 과거의 부를 축적했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연신 보트에 무언가를 싣기에 바쁘다. 하지만 본섬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인파가 늘어나며 여유라는 표현과 어울리지 않는 도시의 모습에 조금씩 실망한다.

본섬은 2개의 다리로 연결돼 있다. 이 중 16세기 대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다리인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는 본섬의 중심부 역할을 한다, 아치 모양 형태를 지닌 이곳에는 시종일관 왕래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장사하는 이들로 소란스럽다. 2m정도의 폭을 가진 다리 위에는 카메라를 들고 난간에 줄지어 기대고 있는 관광객들 천지다. 다리 아래에 뭐 대단한 것이라도 있는 듯 쳐다보는 이들의 모습에 기대감이 생긴다. 하지만 랜드마크라는 호들갑 비하면 조금은 실망할지도 모른다. 많은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 사진 한 장 찍으면 성공이다. 물론 사진에 다른 관광객 어깨가 나오지 않으면 완벽하다.

다리를 건너 노란 ‘Accademia S.Marco’라는 표지판을 따라간다. 방향감각이 무뎌진다고 해도 큰 걱정은 없다. 인산인해의 골목을 마냥 걷다보면 ‘산마르코 광장(San Marco Piazza)’이 눈앞에 딱 펼쳐진다. 널찍한 광장은 ‘ㄷ자’ 형태의 대리석 주랑이 감싸고 있다. 주변에는 웅장한 중세 건축의 걸작이 여행자를 환영한다.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모든 이들의 여정은 다르지만 누구나 이곳에 온다. ‘유럽의 가장 웅장한 응접실’이라는 나폴레옹의 극찬은 지극히 어울린다. 다만 너무 많은 손님을 대접하다보니 응접실이라기보다 다소 소란스러운 시장통처럼 변모한 게 아쉬울 뿐이다.

광장 곳곳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각자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관광객을 부른다. 풍채가 굉장한 연주자들이 세련된 턱시도와 앙증맞은 보타이를 한 채 바이올린, 첼로 등을 켜는 소리는 매력적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1720년에 열었다) ‘카페 플로리안(Caffe Florian)’으로 향한다. 에스프레소 6.5유로, 핫초코 10.5유로의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분위값이라 치고 사색에 빠졌다. 1800년대로 돌아가 괴테와 마주보며 문학적 토론을 펼쳐보고 카사노바로 변신해 민트초코 한잔을 나누는 상상을 한다.

착각도 잠시 소란법석 관광객 무리와 상상초월 비둘기 떼가 습격한다. 카페를 나서 종탑 앞 긴 대기줄을 지나 바닷바람의 향기를 따라 걷는다. 탁 트인 아드리아해와 선착장 주변에 정박한 보트의 모습에서 위안을 받는다. 왼편으로 시선을 돌려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모습을 따라간다. 과거 죄수들이 교도소로 들어가기 전 베네치아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아쉬움에 한탄했다는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는 단지 과거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관광객을 위해 억지로 만든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삐딱한 생각마저 한다. 탄식의 다리 너머 곤돌라 3~4대가 보인다. 관광객 무리를 싣고 목청껏 노래 부르는 ‘곤돌리에르(Gondolier)’ 의 모습은 진정한 현실의 탄식이지 않을까.

베네치아는 골목 사이로 흐르는 운하를 따라 탐방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낭만여행을 꿈꾼다면 마카오의 모조품 베네치아보다 훌륭하다. 하지만 음식가격과 추가세금(자릿세 등)은 금세 여행자의 지갑을 텅비게 만든다. 관광객 홍수에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주민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해상 상업 중심도시가 관광산업의 폐해로 전락한다니 속상한 마음이다.

이곳은 호불호가 분명한 한정판 판매상품이다. 머지않아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한다면 사람들의 발길은 끊길 것이다. 언젠가는 외부와 베네치아를 연결하는 다리가 ‘제2의 탄식의 다리’가 될지도 모른다. 라틴어로 계속해서 오라라는 의미를 지닌 ‘베네치아’는 한정판이라는 특별함에 본인을 가장 비싼 값어치로 대우하며 여전히 여행자를 부르고 있다.

[TIP] 근교 볼거리 및 여행정보

본섬과 20분 거리에 있는 무라노섬은 유리세공업으로 유명하다. 해수욕장과 카지노 등으로 유명한 리도섬도 근교의 볼거리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바포레토를 이용하여 이곳저곳을 다녀보는 것도 좋다. 본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곤돌라 가격은 1대당 80~100유로 수준으로 만만치 않은 가격임은 분명하다. 최대 6명까지 탑승이 가능하니 동행이 있다면 추천한다. 곤돌라에서 바라보는 베네치아의 석양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베네치아 여행시 ‘아쿠아 알타(acqua alta, 이상 조위로 인한 해수고조현상)’ 현상이 일어나는 기간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보통 가을과 겨울의 달의 인력이 가장 강한 1일과 15일 근방에 잘 발생한다. 이 시기에는 산마르코 광장을 포함한 거의 모든 곳이 물에 잠겨 장화를 신고 다니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 두오모와 관광객 사이 : 피렌체

피렌체로 향하는 2시간의 기차 여정 동안 내가 품었던 불편함을 꺼내본다. 여행 중 겪은 불편함은 삶의 슬럼프와 비슷하다. 슬럼프는 부정과 무의미이며 내가 맞이하는 도시의 첫 인상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피렌체도 그다지 세련되지 않다. 역에서 시내 중심부까지 15분 정도 소요된다. 도시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아 도보로 충분히 여행할 수 있을 정도다. 도시의 오래되고 낡은 정도는 건물의 색채와 형태, 포장된 도로로 충분히 알 수 있다. 과거의 모습이 고스란히 유지된 것은 분명하지만 조금은 무거운 도시의 느낌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세계문화유산을 가진 다소 밝은 할렘가 같다.

두오모(Basilica di Santa Maria del Fiore) 근처 숙소에 짐을 풀었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웅장하고 화려한 외관을 가진 두오모는 피렌체의 중심이다. 높이 106m에 달하는 빨간 돔(쿠폴라)은 도심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골목 곳곳을 걷다보면 골목 너머에 웅장하게 솟은 두오모의 모습이 지극히 영화 속 장면 같다.

하지만 내가 방문한 성수기 시절, 이곳에는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비둘기보다 많은 인파가 상시 있다. 특히 내부로 진입하기 위한 줄의 길이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절실한 종교를 가진 신자는 아니기에 더욱 필요성이 없다. ‘쿨내’를 흩뿌리며 그곳을 나가 조토의 종탑(Campanile di Giotto)까지 지나쳐버린다. 두오모와 더불어 도시의 전경을 보기에 훌륭하지만 계단을 오르기 힘들고 긴 줄로 대기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발길을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으로 돌린다.

광장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모조품) 외 수많은 르네상스 조각상이 있지만 역시나 관광객이 무리지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해가 지면 한산해지고 조각상과 건물의 불빛들이 광장을 채워 충분히 매력적이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 잠시 합주하고 있는 거리 악단의 소리에 귀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물의 냄새를 따라 조금 걷다보니 고요한 아르노강이 흐르고 강을 따라 한적한 현지인들의 거주지가 나온다. 강 위를 지나는 다리와 주변의 어두운 노란색 건물들은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익숙한 모습 그대로다. 혹시 피렌체에 대한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바뀐 여행자라면 일몰시간에 이곳을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한적한 공기소리가 뿜어내는 말랑말랑한 촉감에 미소가 번지는 순간, 피렌체가 당신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인 노을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물론 다리 위에 즐비한 보석상점들의 어울리지 않는 매칭은 아직까지 아이러니하다.

강을 따라 동쪽으로 걷다보면 미켈란젤로 언덕이 있다. 부다페스트처럼 웅장한 강과 큰 철교가 야경을 화려하게 수놓지는 않지만, 이곳만이 가지고 있는 소박함이 있다. 혹시, 조금 더 높고 먼 곳에서 피렌체를 느끼고 싶다면 근교도시 ‘피에솔레(Fiesole)’도 좋다. 아카데미아 미술관(Accademia di Belle Arti Firenze) 부근에서 7번 버스를 타고 20여분을 달리면 도착하는 조그만 마을 언덕에서 바라보는 피렌체의 전경은 더 훌륭하다.

르네상스가 최초로 시작돼 유럽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한 도시 피렌체는 과거의 향기를 고스란히 지닌 시간이 멈춘 도시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거리 없다’는 속담처럼 판박이된 정보들이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을 지배했다. 특히 포털사이트의 정보들은 여행자들의 자아를 획일화시켜 유명한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에 들르면 한국여행자가 이렇게 많나 싶을 정도로 모여 있다. 거리의 멋진 유러피안을 구경할 마음에 설레지만, 시끄러운 트렁크 바퀴 소리와 단체 관광객들의 펄럭이는 깃발만 눈에 뛰는 게 바로 이곳이다.

돌이켜보면 이런 회의적 반응은 싫증이라기보다는 갈증일 것이다. 나에게만 한정지어진 상황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여행이라는 것이 날씨, 장소, 시기, 사람 등 모든 환경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야 여행자에게 의미로 전달된다. 만약 성수기가 아닌 봄 내음 나는 최적의 컨디션으로 이탈리아에 들렀다면 여정의 훌륭한 엔딩 장면을 위해 기꺼이 사랑하는 이와 두오모에 오를 의향은 충분이 있다.

칼럼/글 = 장기백 여행칼럼니스트 eyebus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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