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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우리 아빠가 최고수? 나랑 바둑 두면 맨날 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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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우리 아빠가 최고수? 나랑 바둑 두면 맨날 지는데…”

서정보기자 입력 2016-03-18 03:00수정 2016-03-18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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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세기의 대국’ 이후]
부인 김현진 씨-딸 혜림 양이 전하는 ‘딸바보 갓세돌’ 가족 이야기
“가족은 나의 힘” 제주 휴가중 찰칵 알파고와의 세기의 대국을 마친 뒤 17일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이세돌 9단과 딸 혜림 양, 부인 김현진 씨(왼쪽부터). ‘딸 바보’로 유명한 이 9단은 “알파고와 대결할 때 가족과 함께 있지 않았다면 더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귀포=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아빠랑 바둑 두면 제가 늘 이겨요.”

‘딸 바보’ 이세돌 9단(33)은 딸 혜림 양(10)과 가끔 바둑을 둔다. 세계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이 9단이다. 하지만 상대의 돌을 포위하는 단수 정도만 아는 초급자 딸 앞에선 늘 ‘순한 양’이 돼 백전백패다. 이번 알파고와 대결하는 동안 이 9단은 대기실 등에서 딸과 정겨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카메라에 여러 번 포착됐다.

16일 이 9단은 알파고와의 세기의 대국이 끝난 뒤 부인, 딸과 함께 휴식차 제주도로 내려왔다. 그날 늦은 밤 인터뷰에서 이 9단은 “제가 나름대로 ‘강심장’을 가졌다고 여겼는데 기계와의 대결에서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욕심을 부린 것이 패인이 됐다”며 짙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최근 체중이 7kg이나 빠질 정도로 ‘격전’을 치렀지만 “한 달 정도 뒤에 마음을 추스르고 둔다면 5번기에서 최소 2승을 거둘 수 있다”며 승부사의 면모를 보였다.

17일 오전 기자는 전날에 이어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숙소인 호텔로 향했다. 하지만 이 9단 대신 아침식사를 하러 나온 동갑내기 부인 김현진 씨와 딸을 먼저 만났다. 김 씨는 친절하게도 “늦잠 자는 남편이 어차피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못 먹으니까 같이 먹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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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9단은 혜림 양이 초등학교 1학년이 되기 직전 현진 씨와 함께 캐나다로 유학을 떠나 기러기 아빠가 됐다.

“남편요? 모든 인생 계획의 출발점은 딸이죠. 딸의 인생을 위해 어떤 게 가장 좋을지를 제일 먼저 생각하면서 바둑 두듯 ‘삶의 행마(行馬)’를 합니다. 유학도 남편이 제안했어요.”

부인과 딸이 캐나다에 있을 때 이 9단은 한국 바둑계를 떠나 미국에서 바둑 보급 활동을 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당시 국내 바둑 1인자였지만 그에겐 딸과 같이 보내는 시간이 없는 것이 너무 아쉬웠던 것이다. 이 9단은 한때는 바둑 경기 때문에 자주 중국을 가는 점을 고려해 학교를 서울과 가까운 베이징으로 옮기는 것도 생각했다. 그러나 베이징의 공기가 나빠 아이에게 좋지 않다며 계획을 접었다. 그래서 나온 타협안이 제주국제학교(KIS)에 보내자는 것이었다. 알파고와의 대결이 끝나자마자 바로 제주도를 찾은 것도 혜림 양의 입학 상담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빠가 시간이 없어 못 놀아줄 때가 많은데요. 한번 놀아주면 굉장히 재미있게 놀아줘요.”(혜림 양)

아빠가 딸 바보라면 딸 혜림 양도 아빠 바보. 혜림 양의 눈에는 알파고와의 대결이 어떻게 비쳤을까. “아빠가 수읽기 하려고 눈빛이 진지해질 때가 최고로 멋있었어요. 근데 아빠가 수를 놓고 자책하는 모습은 보기 싫었어요.” 혜림 양은 그때를 떠올렸는지 시무룩해졌다가 다시 밝게 웃는다.

김 씨는 “(남편이) 알파고에게 지고 분명 낙담했을 텐데도 저나 애 앞에선 감정 표현을 안 한다”며 “제가 바둑을 몰라 뭐라고 얘기해 주지도 못해 더욱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래서 김 씨는 친한 기사들에게 전화를 돌려 호텔 방으로 오도록 했다. 그나마 이 9단이 동료들과 바둑 얘기를 하면 기분이 풀릴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9단은 2국이 끝난 뒤에는 박정상 홍민표 9단, 이다혜 4단, 한혜원 3단 등과 함께 밤새 바둑 연구를 하며 대화를 나눴다.

김 씨는 특히 이 9단과 마찬가지로 5국 때가 제일 안타까웠다고 했다. 남편이 마지막 대국을 지고 기자회견장에선 밝게 웃었지만 방에서는 좋은 바둑을 놓친 것에 대해 너무 아쉬워하고 자책했다는 것이다. 김 씨가 “5국을 졌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민들이 더 좋아하지 않느냐”고 달랬지만 승부사 이 9단은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속상했는데 그날 저녁 아주버님(이 9단의 형 이상훈 9단) 등 일행과 술을 먹고 새벽 1시쯤 들어와서는 ‘컵라면 하나 끓여 달라’고 하더군요. 너무 고마웠어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하나 생겼잖아요. 얼른 호텔 앞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을 사왔어요.”

이날 오후 제주국제학교에서 상담하고 호텔로 돌아온 이 9단을 다시 만났다. 그는 알파고와의 대결 내내 가족과 함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힘이었다고 했다.

“3국까지 내리 졌을 때 가족이 없었으면 이번 대결에서 졌다는 괴로움을 더 크게 느꼈을 겁니다. 심리적으로 더 추락했을지도 몰라요. 그럼 4국 승리도 없었을 겁니다. 가족 앞에서 가장으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려고 저 자신을 추스른 게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어요.”

서귀포=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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