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중현]고깃국의 추억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3일 03시 00분


코멘트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옆 공장은 어제 고깃국을 줬다는데 우리는 왜 계속 된장국입네까?”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첫 번째 상품인 리빙아트 냄비가 서울의 롯데백화점에서 팔리기 시작한 지 7개월여 만인 2005년 7월. 초기 개성공단 시범단지에 입주한 15개 한국 기업들 사이에서 점심때 제공하는 국의 종류와 내용물을 놓고 눈치작전이 벌어졌다.

당시 개성공단에서 일하던 북한 근로자는 3800여 명. 북한 근로자들이 점심때 먹을 밥과 반찬을 싸왔지만 국물 없이 밥 못 먹는 한민족의 식습관은 남북이 같았다. 한두 기업이 국을 끓여 제공하기 시작했고 이런 관행은 금세 다른 공장으로 퍼졌다. 급기야 한 공장의 북한 근로자 대표가 옆 공장이 전날 제공한 국에 고기가 들었다는 첩보를 입수해, ‘차별 없는 국물’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 얘기를 해준 기업인은 “남북의 생활 격차가 드러나는 걸 북한 당국이 싫어한다. 기사화는 자제해 달라”라고 각별히 요청하기도 했다. 21세기에도 행복의 척도가 ‘이밥에 고깃국’ 수준에서 멈춰버린 북한의 현실을 보여준 대목이었다. 최근까지 북한 당국은 개성공단 북한 근로자들의 식사하는 모습을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다.

초코파이에 얽힌 사연도 많았다. 한국 기업들이 2007년부터 간식으로 제공한 남쪽의 초코파이는 북한 근로자에게 달콤한 자본주의의 맛, 그 자체였다. 북한 당국에 달러로 지불된 임금 중 실제로 근로자에게 얼마가 전달되는지 알 수 없던 한국 기업인들은 근로 의욕을 높일 인센티브로 초코파이를 활용했고 한때 개성공단에는 월 600만 개의 남쪽 초코파이가 반입됐다. 초코파이와 치약, 칫솔, 비누, 수건, 화장지, 면도기 등 근로자에게 제공된 남쪽 물품들은 장마당으로 흘러들어 자본주의의 씨앗이 됐다. 이에 불만을 느낀 북한 당국은 짝퉁 초코파이인 북한산 ‘겹단설기’를 대신 제공하라고 기업들에 요구해, 남쪽 초코파이 반입은 작년 1월 중단됐다.

이달 10일 개성공단이 폐쇄되기 직전 북한 근로자의 수는 5만4000여 명. 삼성전자 임직원 수(2015년 3분기 현재 9만8557명)의 절반이 넘는 숫자다. 숙련된 기술자인 이들은 평양의 특권층을 제외하고 북한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생활을 영위해 왔다. 가족까지 포함하면 20만 명 이상이 자본주의를 간접 체험했다.

공단 폐쇄로 이들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동 중단에 반대하는 야권 관계자들은 “북한 당국이 개성공단 근로자를 해외에 보내면 돈을 더 번다”며 경제 제재로서 효과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북한 해외근로자 중 다수는 시베리아 벌목장, 동남아 건설 현장 등 가혹한 근로 환경에서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다. 한 탈북 지식인은 “자본주의의 물이 들었다는 이유로 이들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라며 걱정했다.

가져본 게 없는 사람은 가졌던 걸 뺏기는 고통을 모른다. 이미 고깃국, 초코파이를 경험한 북한 근로자들은 큰 박탈감을 느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개성공단 가동 중단과 관련해 국회에서 연설할 때 “북한 근로자들에게 닥칠 어려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들의 아픔을 잊지 않겠다”라는 내용을 넣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정은 정권의 핵무기 개발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 개성공단 폐쇄는 불가피했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계속 늘고 있다. 그러면서도 불과 13일 전 폐쇄된 개성공단은 다른 현안에 밀려 관심권에서 빠르게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일자리를 잃은 북한 근로자들의 고통은 반드시 기억돼야 한다. 그들의 뇌리에 새겨진 고깃국의 추억이 통일의 싹을 틔울 때까지.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sanjuck@donga.com
#개성공단#초코파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