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기적’ 이끈 화학 → IT→ 생명공학 ‘창조경제’ 날개달고 新과학입국 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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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새해 특집]과학立國 50년

“지난해 5월 박, 존슨 회담에서 합의된 과학기술연구소가 금주 안으로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라는 명칭으로 정식 발족게 됐다.”

동아일보 1966년 2월 2일 자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이날 KIST 설립 정관에 서명한 데 이어 다음 날 초대 소장으로 최형섭 박사(2004년 작고)를 임명했다. 국내 첫 국가 과학기술종합연구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00달러 남짓이던 시절 KIST를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내 과학기술 연구가 올해로 50년을 맞았다. 과학기술은 ‘한강의 기적’을 이끌며 국가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다. 1인당 GDP는 3만 달러를 바라보고 있다. 허허벌판에서 ‘과학입국(科學立國)’을 내세우며 터를 닦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창조경제’를 새로운 과학입국의 기치로 내걸고 있다.

○ 산업 구조 고도화를 이끈 화학

1970년대는 한국이 화학을 기반으로 한 중화학공업 육성을 본격화한 시기. 장세헌 서울대 화학과 명예교수(93)는 “당시에는 화학 연구가 막 시작되던 때여서 연구개발 환경이 열악했다”며 “화학과 학생들은 실험에 필요한 기자재를 구하기 위해 청계천 상가를 돌아다니거나 직접 연구 장비를 만들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람을 길러 낸 일’을 50년간 국내 화학계가 올린 최고 성과로 꼽았다. 장 명예교수는 “기초과학이 발전하려면 교수 외에도 연구에 참여하는 인력이 뛰어나야 한다”며 “1970년대와 1980년대 화학 관련 산업 기반이 조성되면서 우수한 인재들이 화학계로 몰려왔다”고 말했다. 1990년대에는 삼성과 LG그룹 등이 반도체, 이차전지 등을 개발하기 위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을 대거 채용하며 화학 관련 박사가 많이 나왔다.

그 덕분에 현재 국내 화학 연구 수준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섰다. 장 명예교수의 아들인 장태현 포항공대 화학과 교수(63)는 “1980년대만 해도 국내에서 ‘미국화학회지(JACS)’ 등 세계적인 화학 저널에 논문을 내기 쉽지 않아 논문이 실리는 게 일종의 ‘사건’이었다”며 “지금은 국내 화학자들이 쓴 논문을 세계적인 화학저널에서 보는 게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 88 서울 올림픽을 거치며 비약적으로 발전한 ICT

88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ICT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첫 휴대전화 서비스가 서울 올림픽을 앞둔 1988년 7월 시작됐다. 기존 TV보다 화질이 3배 선명한 ‘고품위 TV’도 이때부터 개발이 시작됐다. 자동응답시스템(ARS)과 5개 국어를 번역할 수 있는 컴퓨터도 나왔다.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뒤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시스템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1985년 귀국한 이종희 모다정보통신 회장(67)은 “1980년부터 귀국 직전까지 미국 벨연구소에서 20∼30년 뒤를 내다보고 미래 기술로 마이크로파를 이용한 무선 전송기술을 연구한 적이 있다”며 “당시 미국에서도 실용화 여부가 불투명했던 이 기술이 지금은 한국이 가장 앞서 있을 정도로 국내 ICT 수준은 높다”고 말했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보다 10년 이상 늦게 시작한 ICT가 정부와 민간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로 한 세대 만에 세계 최고 수준으로 도약했다는 얘기다.

이 회장의 동생으로 22년간 ‘KT맨’으로 살며 정보통신기술 진화를 이끈 이상훈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61)은 “브로드밴드 보급과 이를 이용한 초고속 인터넷 상용화, 월드와이드웹(WWW) 등으로 대표되는 3가지 기술 파도를 잘 타면서 한국이 정보통신 강국으로 도약하는 기틀이 마련됐다”며 “앞으로는 스마트폰을 통한 ‘모바일 빅뱅’이 일어나면서 초연결 사회, 초지능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미래 기술로 꼽히는 생명공학


서울대 교수와 총장을 거쳐 교육부 장관을 지낸 조완규 국제백신연구소(IVI) 한국후원회 상임고문(88)은 국내 1세대 생물학자이자 생물학계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린다. 그는 “1960년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서울대로 돌아올 때 록펠러재단에서 연구비 명목으로 1만5000달러를 받았다”며 “당시로선 큰 금액이라 이 돈으로 세포배양실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1970년대 유전자(DNA) 재조합 기술이 알려질 당시 국내 유전공학자는 17명뿐이었다. 조 상임고문이 이들을 모아 한국유전공학학술협의회를 만들었다. 이에 맞춰 유전공학육성법이 제정되면서 국내 40여 개 대학에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과 등 관련 학과가 생겨났다. 조 상임고문은 “1960년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과학기술 발전 없이는 경제성장이 없다’는 생각으로 과학기술에 투자했다”며 “국내 생물학 연구 육성에는 정부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이후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등 정부 출연연구기관이 줄지어 탄생했다.

대를 이어 생명과학자가 된 조진원 연세대 언더우드특훈교수(시스템생물학과 교수·58)는 “그동안의 노력이 모여서 한미약품의 신약 개발 같은 성과가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며 “앞으로 생물학 연구의 저변이 확대되면 좋은 연구 성과가 더 많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현경 uneasy75@donga.com·신선미 동아사이언스 기자
#화학#it#생명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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